류충현약용버섯

안동사랑

홈 > 회사소개 > 안동사랑

하회마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7-04-28 13:15 조회2,104회 댓글0건

본문







[




hahye-1-02.jpg


하회마을 사진





하회는 물이 태극형(太極形)으로 돌아 흐른다고 지명(地名)을 물하(河), 돌회(回)자를 써서 \\'河回\\'라 부른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승경(勝景)이 빼어나고 갖가지 민속(民俗)과 더불어 학문적(學問的)인 바탕 위에 꽃피워진 정신문화(精神文化)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전통(傳統)마을이다.

특히 지난 번[\\'99. 4. 20]에 영국여왕[엘리자베스Ⅱ]이 다녀간 이래 하회는 가장 한국적(韓國的)인 마을로 부각(浮刻)되어 세계(世界)의 이목(耳目)이 온통 집중(集中)된 가운데 국내외(國內外) 관람객(觀覽客)들은 연일 쇄도(殺到)하여 한마디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하회마을은 전세 버스로 수백 명씩 떼를 지어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적당히 스쳐갈 관광지(觀光地)가 아니다. 적어도 1박 2일 정도는 체류(滯留)하면서 볼 것을 옳게 보고 또 알 것을 바로 알아야 하회의 참 모습을 이해(理解)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銘心)해야 한다.





내가 안동 하회마을에 드나든 지도 벌써 44년이 넘는다. 그러니까 1956년에 재안류씨학우회(在安柳氏學友會)가 조직(組織)되어 하회를 방문(訪問)했을 때가 처음이다.

안동에 거주하는 류씨로서 고등학생들의 모임이 바로 <재안류씨학우회>인데 역사를 배우고 조상의 훈업(勳業)을 기린다는 목적으로 류씨들의 집성촌(集姓村)인 하회(河回)와 무실(務實) 그리고 사촌(沙材)을 번갈아 1년에 한번씩 찾아가기로 했던 까닭에 맨 먼저 하회마을로 가게 된 것이다.

그후 나는 공무원(公務員)이 되고부터는 더욱 많이 하회를 가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물른 그것은 담당(擔當) 사무(事務)가 문화재관리 였다는 데도 있지만 교육청(敎育廳)에서 군청(郡廳)으로 자리를 옮겨서도 그러했고, 이젠 시립민속박물관장(民俗博物館長)이 되어서도 더욱 그러하니 내가 하회를 가야하는 숙명적(宿命的)인 운명은 전생(前生)에 무슨 인연(因緣)이라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하회 사람들은 나를 처음에는 종씨(宗氏)라고 부르더니 이젠 <류관장>이 아니라 아예 성은 빼버리고 <희걸>이라고 불러 주어 나는 마을 사람들과 친숙할 대로 친숙해져서 어느 집 어느방 할 것 없이 무사 출입이다. 그래서 하회마을은 나의 안태(安胎) 고향(故鄕)인 무실(務實)보다 더 좋게만 느껴진다.

서애(西厓) 13대 종부(宗婦) 박필술 할머니는 그 동안 나를 그토록 다정하게 대해 주었고 한때는 사랑주인이 안 계시는 어려움을 당하여 문화재인 종택의 관리와 영모각(永慕閣)의 안내 문제에 부심(浮心)하기도 하였다.

그럴 때 마침 문화재관리국에서 실태조사가 나왔는데 나에게 모든 일을 전권 위임(委任)하다시피 부탁했고 나도 그 소임을 게을리 한 적은 없다. 까닭에 종부는 일기에다 그런 사연을 담아 나를 아예 친자식(親子息)인양 \\'희걸\\'이라 친숙하게 기록하였다.

{명가의 내훈}이란 책은 종부가 펴낸 것인데 그 책 속에 나와의 사연이 그렇게 수록 되어있다.

하회는 문화재의 보고이다. 국보 제121호 하회탈, 국보 제132호 징비록(懲毖錄), 보물 제160호 서애종손가문서, 보물 제306호 양진당(養眞堂), 보물 제414호 충효당(忠孝堂) 등 국가와 지방문화재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까닭에 지금 와서는 하회의 전 마을을 국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하여 민속마을로 보존 보호하고 있다.

하회는 풍산류씨의 동족(周族)부락으로 집성촌이다. 산태극(出太極), 수태극(水太極),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경승지(景勝地)로서도 유명하여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 일러 \\'강거(江居)의 제일(第一)은 평양(平壤)이요 계승(溪勝)의 제일(第一)은 하회(河回)\\'라고 극찬(極讚)하였다.

또 하회는 삼남(三南) 4대 길지(吉地)의 하나로 양동, 닭실, 천전과 함께 복거지(卜居地)로 가장 으뜸이며 풍수지리설에 \\'연화부수(蓮花浮水)\\'란 명당(明堂) 터라고 한다.

향언(鄕言)에 \\'하회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써 배판\\'이란 말이 있다. 이는 허씨(許氏)가 터를 잡았고 안씨(安氏)들이 살다가 지금은 류씨(柳氏)가 문호(門戶)를 열고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하회에 이처럼 삼성(三姓)이 교체(交替)된 것은 바로 풍수지리설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길국인 \\'연화부수\\'를 어떻게 대처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다는 이야기다. \\'연화부수\\'는 연꽃이 물에 뜬 형국(形局)을 말하는데 수련(水蓮)은 꽃도 열매도 일시에 구비한 유종의 미를 이룩함과 동시에 방향(芳香) 높은 원만한 꽃이므로 비보(裨補)만 잘 한다면 길기(吉基)의 소응(所應)으로 자손들이 번성하며 명예가 청사로운 걸인(傑人)이 배출된다고 한다.

그런데 수련은 경사스런 꽃일지라도 물밖이나 물속에서는 피지 않고 다만 수면(水面)에 떠서 피기 때문에 가거(家居)의 기지(基地)를 수면보다 너무 높게 해서도 안되고 너무 낮게 해도 좋지 않다.
이곳 풍산 류씨들은 고려말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공의 적선지보(積善之報)로 여기에 이사(移徙)해서 길기의 명당형국을 잘 비보(裨補)하였으므로 복거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풍수설의 이치를 몰랐던 허씨는 산간(山間) 높은 곳에, 안씨는 하안(河岸) 낮은 곳에 살았으니 비보의 잘못으로 발복이 짧았고 류씨는 \\'연화부수\\'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수평과 비슷하게 택지를 정한 까닭에 길기(吉基)의 소응(所應)이 오래 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산천이 변했고 평파지(平坡地)도 달라져서 그 옛날을 상기하기에는 어려우나 조선조 선조때 대신(大臣)이자 학자인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선생은 부원군(府院君)(柳從惠) 집에 있는 하회도(河回圖)란 그림을 보고 지은 시에 <(洛江淸漲 欲侵扉, 千里帆檣 到此稀>라 하였다.

즉 \\'낙동강 물이 불어 사립문에 찰랑찰랑 해도 천리범장 인들 한번 도 여기까지는 들어 온 적은 드물다\\'고 한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하회에 입향한 류씨들은 처음부터 수평(水平)과 같은 곳에다 집을 짓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연화부수형국\\'을 잘 이용했기 때문에 그 소응(所應)으로 하회가 풍산류씨(豊山柳氏)들의 영원한 터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회에 삼성(三姓)이 교체(交替) 되었다는 향언(鄕言)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다음 전설이다.


1. 허씨 터전[터를 먼저 잡은 허씨]



하회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별신굿 탈놀이에 사용되었다는 목조가면이 전한다. 이 탈은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목조가면(木造假面)으로 가장 오래된 고려(高麗) 때의 것이다.

지금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데 이 탈에 대한 전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 옛날 하회마을 동사 앞마당에는 부락민 모두가 모여 앉아 재미나는 놀이를 만들고자 여러 가지 의논이 분분하였다.

놀이에 등장하는 인물은 양반, 선비, 초랭이, 영감, 부네, 이매, 백정, 할미, 주지 그리고 소(牛) 등으로 우선 결정하였다.

이때 총각 하나가 "아닙니다요! 얼마전 윗마을에 중이 나타나 각씨를 업고 도망갔다는데 기왕지사 삐뚫어진 양반사회를 풍자(諷刺)하기로 했다면 중과 각씨 마당도 집어넣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 말에 모든 사람들은 박장대소(拍掌大笑)하며 찬성했다. 온 마을 사람들은 놀이를 꾸미는데 신바람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놀이는 당시 철저한 신분(身分)과 계급(階級) 속에서 하동[아랫것]들이 풍자적(諷刺的)이고 해학적(諧謔的)인 표현으로 지체 높은 양반들을 신랄하게 조소(嘲笑)하고 비판(批判)하는 내용으로 꾸몄기 때문이다.

그런데 맨 얼굴로 춤을 추게 되면 누가 어떤 역할을 하고 또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게 됨으로 춤추는 자도 꺼리게 되고 보는 사람도 흥이 없을 것이므로 탈을 만들어 쓰기로 합의되었다.

그리하여 이 마을에 번을 서고 있는 손재주 좋은 허도령에게 일을 부탁하기로 했다. 허도령은 극구 사양했으나 꿈에 마을 수호신으로부터 탈 제작(製作)의 계시(啓示)를 받고 나서 승낙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어 허도령은 가을이 깊어갈 무렵 하회마을 뒷산 수목이 울창하고 한적한 곳에 외인의 출입을 막는 금색을 친 다음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전심 전력을 다 하여 열 두개의 탈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허도령이 탈을 다 만들려면 석달은 넘어야 할 터이니 모든 정성을 다해 훌륭한 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一念)뿐이었다. 백정은 사나우면서도 솔직한 모습을, 할미에게는 주름지고 고생에 찌들인 늙은 모습을, 초랭이는 진짜 촐랑대는 얄밉고 익살스러운 모습을…… 섬세하고 교묘하게 만들어 놀이를 한층 더 즐겁게 해 주어야지 하면서 열심히 탈을 제작하고 있었다. 허도령이 이처럼 탈 만드는데 전념하고 있을 때 마을 처녀들 사이에는 허도령이 종종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그러니까 허도령이 탈을 제작하는 모습은 마치 신선 같다느니 아니면 뛰어난 귀공자를 닮았다는 등 처녀들은 은근히 그를 사모(思慕)하기에 이르렀다.

어느날 사모의 정이 넘친 한 처녀가 밤중에 홀로 일어나 뒤편의 은행나무 앞에 매일 정화수를 떠놓고 하루 빨리 허도령이 탈 만들기를 끝나게 해달라고 지성으로 빌었다. 그러기를 석달 되던 어느날 떠놓은 정화수 속에 허도령의 모습이 보였다. 만들어 놓은 탈과 함께 영롱하게 허도령의 얼굴이 비쳤다는 것이다.

이제서야 탈을 다 만든 것이로구나 생각하니 그 처녀는 허도령이 보고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처녀는 그만 참지 못해 허도령의 처소(處所)를 찾아갔다. 교교한 달빛은 처녀의 가슴을 더욱 애타게 한다. 늦은 밤인데도 허도령은 탈 제작에 여념이 없다. 마침 마지막 탈인 이매의 턱을 깎으려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은 과연 하늘에서 신선(神仙)이 내려와 앉은것 같았다. 아름다운 모습을 문틈으로 훔쳐본 처녀는 연정(戀情)을 누를 길 없어 그만 입을 열고 말았다. "도령님! 허도령님! 잠시 손을 멈추시고 저와 이야기를 나누어요. 네!" 허도령이 이매의 턱을 만들려다 말고 여인의 목소리에 깜짝놀라 "아니? 이 밤증에 웬 계집이? 밖에 뉘시오!" 하면서 안절부절하였다.

처녀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도령님 ! 도령님이 그리워 찾아 왔어요 저를 좀 만나 주세요." "에잇! 요망할 부정한 계집이 탈 만드는 광경을 훔쳐보다니……."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하늘에는 번개가 치고 억수같은 비가 쏟아 졌는데 어쩐 일일가? 허도령은 그만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러자 처녀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다가 실족으로 벼랑 끝에 떨어져 그 또한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매탈>은 턱이 완성되지 못했다고 전하며 오늘날 하회탈춤에는 턱없는 이매가 등장하여 바보의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전설을 보아 허씨가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래서 허써터전이라고 한다.


2. 안씨문전(정승이 날 터보다 피 천석 소원)



옛날 하회마을 낙동강 하안(河岸)의 오막살이집에 안씨 부부가 살았다. 어느 날 지나던 중이 날이 저물어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한다.

찢어질 듯이 가난하여 먹을 것조차 변변치 못해 딱한 처지이었으나 마음씨 착한 안씨 내외는 스님을 거절할 수가 없어 재워주기로 허락했다. 그렇지만 먹을 것이 없다고 스님을 굶길 수는 없었다. 이들부부는 저녁거리 때문에 온갖 궁리를 하다가 결국은 천장 갓집 옆에 매어 달아둔 명년 봄에 농사지을 피 종자를 꺼내어 저녁을 장만해 대접했다.

스님이 주인의 얼굴을 살펴보니 근심이 역력하였다. "여보! 주인장, 보아하니 걱정이라도 있는 듯 하온데 무슨 까닭이십니까?"고 물었더니 안씨는 작년 봄에 친상(親喪)을 당했지만 가난 때문에 묏자리를 구하길 없어 여태까지 아버님의 유택을 마련해 드리지 못하여 불효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면서 고개를 떨구는 것이었다.

스님은 안씨의 착한 마음과 공손한 대접에 감동하여 그를 도와주기로 결심하였다. 날이 밝자 스님은 "주인장! 어젯밤 이 댁에서 베푼 은혜에 감사하여 내가 묘터 하나를 잡아 드리지요" 하면서 자기를 따라 나서라고 한다.

안씨와 과승은 하회의 동쪽 화산(花山) 근처 산중턱을 올랐다. 어느 곳을 택한 스님은 "이 자리가 명당이긴 하오만……." 하는 것이다.

사연인즉 여기에 묘(墓)를 드리면 3대 후에 정승(政丞)이 난다는 말을 했다.
불같이 없던 가난 때문에 지친 안씨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눈이 멀어서 이를 마다하고 다른 곳을 찾아 부친의 장사를 지내고 말았다.

그 자리는 당년에 피천석을 거둘 수 있다는 명당이었다. 그리고 나서 안씨는 스님이 시켜준 대로 피 종자를 열심히 구하여 이른봄 하회의 낙동강 가에 뿌렸다. 시절이 좋아 그해 가을에 피 천석을 수확하게 되어 그는 당년에 큰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로써 하회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향언(鄕言)이 생겨났고 또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길지(吉地)는 자고(自古)로 각기 그 임자가 따로 있는 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積善之家>에 <必有餘慶>이란 말처럼 복거지를 조기(肇基) 함에는 반드시 삼대에 걸친 적선(積善)이 있어야 한다는 지사(地師)들의 이야기다. 이처럼 하회 땅을 류씨가 차지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풍산 류씨가 이 산수향의 주인이 되기는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6대조인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 공에게서부터 비롯되었다.

본래 류씨는 선향(先鄕)이 풍산(豊山) 상리(上里)였는데 대대로 고려(高麗)의 녹(祿)을 먹은 지체 높은 가문으로 전서공의 조부인 난옥(蘭玉 : 都染署令)께서 어느 공부 높은 지사를 찾아가서 택지를 구했던 바 3대에 걸쳐 적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명당터를 얻고자 하는 억척같은 집념(執念)에서 류 서령은 곧 하회의 동구 밖 큰길가에 관가정(觀稼亭)이라는 큼지막한 집을 짓고 오가는 불쌍한 나그네를 모조리 불러드려 따뜻하게 보살피기를 아들 보(補)에서 손자 전서(典書)공까지에 이르렀다.

이렇게 꼬박 3대에 걸쳐 쌓은 공덕(功德)으로 하회를 얻은 것이니 더 높은 복샘의 근원은 글자 그대로 원원류장(源遠流長)이련가! 상하 반 천년 동안 문운(文運)이 한결같아 관직(官職)과 학문(學問) 높은 걸사(傑士)들이 줄지어 배출되었다.

하회는 겸암파(謙菴派)와 서애파(西厓派)로 갈린다. 겸암파는 풍산 류씨의 대종파이고 서애파는 겸암의 아우인 류성룡의 후손을 말한다.

입향조(入鄕祖)를 중심으로 파가 형성되기 까지의 계보(系譜)는 다음과 같다.


◈ 入鄕祖 류종혜(柳從惠) -흥 (洪) - 소(沼) - 자온(子溫)
-공작(公綽) - 중영(仲 )- 운룡(雲龍)
- 성룡(成龍)


겸암(謙菴)이란 운룡(雲龍) 선생의 호(號)는 퇴계(退溪)가 지은 것이다. 겸암이 29세 때 마을앞 부용대(芙蓉臺) 서편 강안(江岸)에 서재(書齋)를 짓고 편액(編額)을 퇴계의 글씨로 받았는데 <聞則君構 新齋好欲去同床 恨未如>이라. "듣자니 군은 새로 좋은 서재를 이룩했다는데 내가 가서 한자리에 앉고저 하나 마음과 같지를 않아 한이 로구나" 하면서 서재의 이름을 겸암정(謙 亭)이라 지어 주었다.

어느 문헌에 보니 퇴계(退溪) 선생이 서재의 이름을 겸암(謙 )이라 한 것은 <류운룡 사사물물의 호오(好惡)를 가리기에 너무나 분명하니 혹 세인들로 하여금 오해를 받는 예(例)가 있어 겸손하라는 뜻으로 겸암(謙 )이라 써 주었다>는 것이다. 그때 퇴계는 겸암이라 바위 암( )자로 썼으나 나중에 류운룡은 자기의 호를 정하면서 겸암(謙菴)이라 집암(菴)자로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류운룡의 서재와 호의 글씨가 다르다는 점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후 겸암의 5대손 류영(柳泳)께서 퇴계의 친필로 된 겸암정사(謙 精舍)란 현판을 정자에 걸고 또 자기의 호를 양진당(養眞堂)이라 하였으므로 겸암종가의 당호(堂號)를 오늘날 \\'양진당\\'이라 부른다.

다음은 충효당(忠孝堂)인데 이는 서애(西厓)의 증손 우눌재(愚訥齋) 유의하(柳宜河)공이 외당을 확장(擴張)하면서 \\'충효당\\'이라 하였다. 편액은 당대의 명필 미수(眉 ) 허목(許穆)의 글씨인데 미수의 글씨를 붙이면 화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충효당>이란 뜻은 서애 선생이 임종시에 유계(遺戒)한 말로써 (오가 충효지 외 무사업(吾家 忠孝之外 無事業))이라 하였으므로 길이 자손 만대에 충성(忠誠)과 효도(孝道)를 근본(根本)으로 하라는 의미(意味)를 담고 있다.

이렇게 되어 겸암과 서애를 두고 파를 나누게 되었으며 오늘날 겸암종가는 <양진당>이고 서애종가는 <충효당>이다.

하회에 사는 풍산류씨 대종가는 양진당인데도 사람들은 그 양진당보다 서애 종가인 충효당을 더 많이 찾고 있다. 이는 서애가 임란때 영의정(領議政)으로 누란(累卵)의 위기(危機)에 처한 나라를 구해낸 명재상가(名宰相家)란 점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까닭이며 또한 그보다도 임란 당시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귀

중한 문헌과 자료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집에 종부로 입문하여 자손을 낳아 주었음은 물론이려니와 그보다 더 자랑할 것은 선조의 유물을 간직했다는 것이다. 몇 번의 전란을 겪고 또 근세에 와서 6.25까지 당하여 웬만한 집들은 전가유물들을 모조리 소실(燒失) 하였지만 나는 이를 부둥켜안고 오늘에 이르렀으니 저 궤짝에 가득한 문서들이 바로 그것이다\\' 라고

박필술 할머니는 자랑한다. 충효당을 찾게되는 원인이 곧 여기에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런 귀중한 문서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정리하여 전시(展示)해 둔 영모각(永慕閣)이 충효당 안에 있으니 하회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충효당으로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닐런지.


3. 서애 선생은 치숙과 내기 바둑



78년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나는 영모각 단청공사 관계로 충효당을 들렀다. 사랑 대청 마루에는 종손(류영하)과 그의 당숙(류시중)은 내기바둑을 두고 있었다. 바둑판 머리맡에는 만원짜리 지폐가 서너 장 놓여 있고 종손은 이마에 힘줄을 세운 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아마도 몇 판은 진 것 같다. 옛말에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다\\'고 한 것이 바둑이다. 저런 판국에 내가 인사를 한들 받기나 할까? 그만 나는 그 자리를 얼른 피하여 내당으로 들어갔다. 마침 종부가 계셨다. 여기서 종부란 박필술 할머니를 말한다. 지금 종부는 그의 자부(子婦)로 최씨 부인이 있기 때문에 혼동(混同)을 막기 위하여 박여사란 것을 굳이 밝혀둔다.

종부는 나를 무척 반기신다.
"여 ! 희걸이 오랫만이구려, 그래 한동안 뜸하거든 이젠 하회에 발길을 끊은 줄 알았다"고 농담을 한다. "대청에 두 어른들 바둑이 절정이 십디다""그러게 말이다. 저놈의 바둑 때문에…….

" 종부는 역정을 낸다."시주(時柱)씨는 어디 갔습니까?"

하회마을 수호를 위하여 파견(派遣)해 둔 시청(市廳) 직원(職員)이 바로 시주(時柱)이며 그의 택호는 봉화댁이다.

"시주씨, 있지럴" 하면서 툇문을 열고 "어이 ! 봉화 아재 ! 봉화아재 ! 영모각에 있는가?"

부르면서 군(郡)에서 희걸이가 나왔다고 한다. 얼마뒤 시주가 왔고 우리들은 커피를 들면서 영모각(永慕閣)의 단청(丹靑) 문제를 의논하였다. 그리고 충효당 사당(祠堂) 보수(補修)문제도 거론하여 상부(上部)에 보고하기로 이야기는 끝이 났다.

이젠 담소(談笑) 시간이다. 사랑방 저 사람들 바둑에는 말릴 장사가 없다고 한 박필술 할머니는 서애 선생과 치숙간의 바둑내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임란때 전란을 슬기롭게 수습한 명재상인 서애대감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받던 치숙이란 그의 숙부가 신통한 선견지명에 탄복했다는 일화가 있다. 사람들이 치숙이라 부르는 것은 그의 숙부가 술이나 마시고 집안 일에는 전연 관심이 없는 숙맥 같은 분이었으므로 붙혀진 별명이라고 한다.

어느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 치숙이 조카 서애(西厓)를 찾아왔다. 그때도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비틀거리며 몸도 가누기 어려운채 대문을 들어선다. 하인들마저도 싫어서 인사를 제대로 하질 않는다. 그러나 치숙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소리를 버럭 지르며 주정을 부린다. 그러다가 서애의 별채로 들어가 안색을 고치고 태도를 정중히 하여

"거참 날씨한번 좋구나! 아주 청명한 날씨란 말일세. 여가가 있으면 한판 두지?"

하면서 책상 머리에 다가앉는다. 서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평소에 숙부가 바둑을 둔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숙부는 바둑을 두지 못하지를 않소이까? 그 실력으로써 저와 대국하자 하심은 무리 아닐런지요"

서애는 한마디로 거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내기를 하세! 내 집 됫밭 두 마지기를 걸고 내기 바둑을 두어 보면 알 것이 아닌가?"

치숙의 완강한 청에 하는 수 없이 드디어 숙질간 대국은 벌어지게 되었다. 자신(自身) 만만하게 첫 국을 두던 서애는 그의 신묘(神妙)한 술수(術數)에 몰리어 그만 반국 만에 불계승으로 숙부 앞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후 서애는 남이야 무어라고 말할지라도 숙부는 결코 범상(凡常)한 인물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느 날 저녁이다. 치숙이 찾아와 이르기를 "내일 저녁 무렵 한 중이 찾아와서 하룻밤 숙식을 청할 것이니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완강하게 거절하여 우리 집 뒤 모암으로 보내도록 하게" 하면서 꼭 실수 없기를 당부하였다. 그 소리에 반신반의(半信半疑) 하면서 작별했는데 아니나 다를가! 그날 오후 황혼(黃昏) 무렵에 과연 중이 왔으니 그 중의 몰골은 흉악스럽기 만 하였다.

"소승은 오대산 깊은 산사에서 수도하는 중이온데 일찍이 고매하신 선생님의 학문과 덕망을 숭앙하여 좋은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하면서 하룻밤을 함께 유숙하기를 간청하였다. 서애는 그 중이 몰골 보다는 언어의 정중함에 그만 허락하려 하다가 일전에 치숙께서 당부하신 \\'절대로 실수 없기를 바라네\\' 그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퍽 유감이오마는 마침 오늘은 집에 불미한 일이 있어 어렵겠습니다"라고 거절하면서 꼭 이 마을에 머물 작정이라면 뒷산에 있는모암으로 가면 정자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라고 일렀다.

중의 한결같은 유숙키 위한 감언이설(甘言利說)을 기여코 뿌리친 서애는 결국 그 중이 모암으로 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주기(酒氣)가 하나도 없는 치숙이 단정한 모습으로 중을 맞이하였다. 반가이 인사를 나누자 곱게 단장한 여인이 주안상(酒案床)을 들고 들어왔다.

중은 술맛을 보더니 "이런 좋은 곡차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묻는다. 치숙은 "이것은 여기 앉은 이 여인이 손수 빚은 것인데 본래 기생 출신이라 술빚는 솜씨가 비상하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싫지 않으시다면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껏 드시라고 권했다.

중은 주흥(酒興)에 도취되어 하회의 맑은 물로 빚은 명주와 깨꿋한 산채 그리고 진귀한 안주를 정신없이 들이키더니 그만 녹아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바로 그때다. 치숙은 중의 가슴 위에 올라타고 비수를 목에다 드리대고 "네 이놈! 너는 일본의 첩자지? 만약 바른 대로 대지 않는다면 이 칼로 너놈의 목을 잘라 버릴테다" 호령했다. 그러나 바른말로 이실직고를 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서 돌려보내 주겠다고 유도(誘導)를 한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중은 까무러치게 놀라 "소승은 풍신수길의 밀정으로 장차 조선을 치는데 큰 장애가 되는 인물인 서애 대감을 없애라는 지령을 받고 왔습니다"라고 실토하면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러자 치숙은 칼을 거두고 바로 앉아 이르기를 "나라의 재난(災難)은 천운(天運)이니 내 작은 인력으로 막을 길은 없을 터이나 내 고장만은 목숨을 걸고 지킬 터이다. 그리고 왜구(倭寇)가 이 땅에 들어오면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죽여버릴 것이니라" 그러니 너는 중이므로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 돌아가서 조선엔 함부로 침략할 수 없는 땅임을 알리도록 하라고 준엄한 꾸지람을 한 뒤 놓아주었다.

중은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일본으로 돌아가 그 경위를 풍신수길에게 전하니 수길은 크게 놀라며 부하장수에게 일러 "안동 일대는 절대로 발을 들어 놓지 말라"고 명을 내렸으니 임진왜란 때 안동은 무사했다는 것이다.

\\'서애 선생께는 숙부가 없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어찌하여 하회에서 생겨났고 또 서애와 관련된 이야기로 비화되었음은 무슨 이유일까? 의문이 가지 않을 수가 없\\'고 종부(宗婦)는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내가 농담을 걸어 "아니! 저는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바로 사랑마루에서 내기 바둑에 정신없는 영하씨 종숙질이 아닐가요 ? 했더니 모두들 한바탕 웃음으로 일화가 남기는 의미를 음미 해보았다.

hahoev.jpg


4. 공존하는 두 민속의 의미



하회마을에는 두 가지 민속놀이가 있다. 그것은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유줄불놀이>다. 이 놀이는 그 주체가 서로 다른 양반과 하동들의 놀이란 점이 주목된다. 탈춤은 한 마디로 양반들을 욕보이는 하인들의 넋두리다. 다시 말해서 평소에 쌓였던 주인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말끔하게 풀어버리는 풍자극(諷刺劇)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낸다.

잠시 양반과 선비 마당을 살펴본다. 무대에는 양반과 선비가 등장하여 서로가 자기의 조상(祖上)을 자랑하는데 초랭이는 그 중간에서 이간(離間)을 부친다.

<양반> 우리 조상은 사대부(士大夫)거든.<선비> 우리 조상은 팔대부(八大夫)이지.

<양반> 팔대부는 도대체 또 무엇인고 ?

<선비> 그러니까 사(四)보다는 팔(八)이 더 높다는 말이외다.그 다음에는 우리 조상은 문하시중이라고 자랑하는 양반을 보고 선비는 우리 조상은 문상시대라고 말하여 문하(門下)보다 문상(門上)이 높다 하고 시중(侍中)보다는 시대(侍大)를 더 높다는 식으로 입씨름을 하면서 자기의 지체(肢體)가 더 높다고 한다.

이때 백정이 \\'소부랄 사이소 ! 소부랄\\' 한다. 서로 지체높은 가문(家門)이라고 자랑하던 양반과 선비는 체면 때문에 소부랄을 사려고 하지를 않는다. \\'이봐! 백정, 그 소부랄은 저기 등넘어 하동들에게나 가서 팔게\\'하며 거들떠보질 않았다.

백정이 돌아서면서 \\'소부랄 사이소! 이 소부랄은 양기에 억세게 좋으이더. 하나만 자시면 부인 둘을 거느릴 수 있니더\\'라고 큰소리를 지른다. 양기에 좋다는 그 소리에 양반과 선비는 체통이고 무엇이고 다 버리고 한꺼번에 달려들어 소부랄을 사겠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소부랄을 맞잡고 "이것 내 것일세", "아니야, 이건 내 것일세" 서로가 자기부터 사려고 했다는 뜻으로 내부랄이라고 한다. 그럴 때 지나가던 할머니가 나타나자 소부랄에서 손을 놓고 어험! 헛기침을 하면서 돌아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시치미를 딱 땐다.

그만 소부랄은 땅바닥에 떨어진다. 꼬부랑 할머니는 그 소부랄을 얼른 집어들고 흙 묻은 것을 툭툭 털면서 "도대체 별꼴이야! 부랄 하나를 가지고 양반은 지 부랄이라 하고 선비도 지 부랄이라 하니 대관절 이건 뉘 부랄 이란 말이고?" 하면서 그 부랄을 높이 쳐들고 양반의 턱밑에 한번 들이 밀었다가 또 선비 얼굴앞에 한번, 이렇게 번갈아 들이대면서 망신을 시킨다.

그야말로 양반과 선비는 난처한 입장이 되고 만다. 이 얼마나 해학적인 풍자극인가? 하회탈춤은 이런 식으로 모두 열 마당이 있으나 이 정도로 소개한다. 그러면 이처럼 양반을 모욕(侮辱)하는 탈춤이 어떻게 하회마을에서 전승되었을까? 하회 어른들이 왜 그런 놀이를 그냥 두었을까! 여기에는 이러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당시(조선조) 엄격한 계급사회에 양반들은 호랭이 담배 피울 줄만 알았지 하동들의 설움을 이해하려는 양반은 좀처럼 없었다. 그러나 하회의 양반들은 그러치 않았다는 점이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비록 일정한 대사가 정해져 있기는 하나 연기자가 즉흥적으로 상전을 모독하는 언행이 있을지라도 이는 신의 계시라 하여 자아(自我)를 반성(反省)하는 계기로 삼았다는 것이다.

평소 내가 저들에게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반성하고 관용(寬容)을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탈춤 추는 그날 하루만이라도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게해 줌으로써 후일 보다 더 강한 복종심을 자아내게 한다.는 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비단 하회탈춤뿐만 아니라 탈춤이란 대개(大蓋) 이러한 맥락(脈絡)을 같이하고 있음은 바로 우리 조상들의 지혜(智慧)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7월 기망(旣望)에 부용대(芙蓉臺) 앞 강물에서 선비들만이 시주(詩酒)를 나누던 멋진 풍류가 있으니 바로 \\'하회선유줄불놀이\\'이다.

이 놀이는 중국의 소동파 적벽부(赤壁賦)에서 기인(起因)된 것으로 절벽이 있고 강물이 좋은 곳이라면 흔히 놀았다는 양반 선비들의 유흥(遊興)인 것이다. 옥연과 부용대(芙蓉臺)를 수놓는 선유줄불놀이는 4가지 내용으로 나뉘어지는데 <줄불>과 <달걀불> 그리고 <낙화(落火)>와 <뱃놀이>다.

줄불이란 뽕나무 숯을 곱게 빻아 소금을 중간중간 넣고 창호지로 싼 다음 그것을 다시 여러 마디로 묶어 수 백개를 만들고 부용대 꼭대기에서 만송정 숲까지 드리운 긴 줄에 매어 달아 불을 붙인다.

불은 숯가루가 타면서 소금이 튈 때마다 폭죽처럼 한 마디씩 터지면서 불꽃이 튄다. 그 터지는 모습은 휘황찬란하게 강물위로 떨어지면서 온통 하늘에는 꽃불이 유성처럼 흘러내린다. 그 장관은 보는 이 들로 하여금 \\'야 아!\\' 하는 감탄의 환호가 저절로 나오게 된다.

달걀불은 달걀 껍질에 기름을 담아 불을 부치고 강물 위에 띄워보내는 것인데 짚으로 만든 따뱅이에 하나씩 얹어서 부용대 상류인 형제바위 쪽에서 한번에 20∼30개를 흘러 보낸다.

이것이 옥연정 앞 쏘까지 떠내려오면서 맴돌고 섯도는 모습은 마치 불 오리 떼가 구애(求愛)하면서 노는 것 같다.

다음은 낙화(落火)란 것인데 솔갑과 장작단에 불을 덩겨 부용대 꼭대기에서 절벽 아래로 던지는 놀이다. 던지는 시기는 \\'낙화야!\\' 하는 소리가 있을 때에만 하나씩 던진다. 이때 장작불이 떨어지면서 수백길 높은 벼랑을 뒹굴러 이리 부닥치고 또 저리 부닥치며 타오르는 불길은 감탄과 박수 없이는 볼 수 없는 멋진 장면으로 놀이는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더 말해 둘 것은 이 낙화는 무작정 \\'낙화야\\'가 아니고 선비들이 배위에서 시(詩) 한 수를 지었을 때란 것이다.

마지막으로 뱃놀이다. 모르긴 해도 줄불놀이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선유(船遊)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줄불과 낙화는 선유를 돕는 엑스트라 역이다.

배에는 오색 초롱을 달고 수십 명의 선비들이 기생을 대동한 채 주연 (酒宴)과 시회(詩會)를 하는 가운데 노래와 춤으로 하룻밤을 마음껏 즐긴다.

이 놀이는 류씨 동족집단의 성원들만이 직접 참가할 수 있는 오락으로 각성들의 평민이 주도가 되는 탈춤과는 대조적인 놀이로 신앙심이나 교훈적 의미보다 단순한 유흥의 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1987년 안동민속축제 때 이 놀이를 재현(再現)했던 바가 있는데 오랜만에 보는 이 장면을 전국에 TV로도 생중계 되었고 현장에서는 내가 그 유래와 진행을 맡았다.

그때 나는 "낙화야!" 큰 소리를 외치자 관중들도 따라서 "낙화야!" 하였는데 놀이가 절정에 달하자 나도 흥이 나서 "낙화야!"가 "낙화야!"에 뒤이어 "좋다!"까지를 선창하니 수 백명의 관중들이 함께 "좋다!"고 소리 치르므로 부용대 절벽이 무너지듯 쟁쟁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5. 하회의 16경



택리지(擇里志)에 하회를 일러 계승(溪勝)의 제일(第一)이라 하였다는 것을 앞에서 기술하였다. 그러나 제일이란 말 만으론 너무 상징적(象徵的)이기에 모두가 실감할 수 있는 하회의 16경(十六景)을 읊은 서애선생 손자 류원지(柳元之)공(公)의 글을 적는다.


1. 입암청창(立巖晴漲) : 갈모바위에 물 불어 오르는 경치

2. 마암노도(馬巖怒燾) : 말 바위에 물결치는 경치

3. 화수용월(花峀勇月) : 화산에서 달 솟아오르는 경치

4. 산봉숙운(蒜峰宿雲) : 마늘 봉에 걸린 구름의 모습

5. 송림제설(松林霽雪) : 만송정 소나무에 눈 녹는 경치

6. 율원취연(栗園炊煙) : 백율 동산에 연기 서린 경치

7. 수봉상풍(秀峰霜風) : 남산 감투 봉에 단풍든 경치

8. 도잔행인(道機行人) : 돌고개 비탈길의 행인들 구경

9. 남포흥교(南浦紅橋) : 남쪽 나들이 무지개 다리 모습

17. 원지영우(遠志靈雨) : 원지산에 비묻은 경치

11. 반기수조(盤磯垂釣) : 부계 넓은 바위에서 낚시하는 경치

12. 적벽호가(赤壁好歌) : 부용대 위에서 노래 부르는 경치

13. 강촌어화(江村漁火) : 강촌에서 불 들고 고기 잡는 경치

14. 수림락하(水林落霰) : 수림 고개에 저녁노을 모습

15. 도두행주(道頭行舟) : 도선장에 배 건너는 경치

16. 평사하안(平沙下雁) : 옥연정 앞 백사장에 기러기 앉은 경치



6. 하회의 불천위(不遷位)4>


하회에는 4위의 불천위(不遷位)가 있다. 불천위는 부조(不 ))를 뜻하는 것인데 신위를 조매하지 않고 영구히 사당에 모신다는 말이다. 대체로 봉제사(奉祭祀)는 4대까지만 하고 5대 즉 고조부 그 이상은 사당에 모시던 신위를 옮겨서 묘소옆에 매장(埋藏)한다. 그래서 유가(儒家)에는 통상 4대 봉사(奉祀)라고 한다.

불천위를 정하는 방법은 공존사직(功存社稷)하고 수업후예(垂業後裔)로 저명한 어른이면 나라에서 부조명회(不 命會)하거나 또는 사림(士林)의 합의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불천위가 있는 집을 종가(宗家)라 칭하고 그 맨끝 손을 종손이라 부른다.
그런데 항간엔 웬만한 집이면 곧장 종손과 종부라고 하는데 이는잘못이다. 4 대 봉사집은 종손이 될 수 없고 다만 주손 또는 큰집 주인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 하회에서 불천위로 모시는 어른은 다음과 같다.


1) 류중영(柳仲郢) 입암(立巖)이다. 도회에서 불천위로 결정했다. 선생은 중종10년(1515)에 나서 선조6년(1573)에 졸(卒)하였다.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언우 호는 입암이며 본관은 풍산인데 군수를 지낸 류공작의 아들이다. 중종35년(1540)에 문과에 병과(丙科)로급제 출사(出仕)하여 장령(掌令)을 하고 이어서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했으며 내직(內職)으로는 승지, 경연관이 되었다. 저서는 입암집(立巖集)이 있다.


2) 류운룡(柳雲龍) 겸암(謙菴)이다. 역시 도회에서 결정했다. 선생은 중종34년(1539)에 나서 선조34년(1601)에 졸하였다.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菴)인데 관찰사(觀察使)류중영(柳仲郢)의 장자이다. 이퇴계의 문인으로 선조5년에 음보(蔭補)로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가 되었고 풍저창직장(豊儲倉直長)으로서 유능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다.

인동현감, 풍기군수, 원주목사를 지냈는데 졸(卒) 후 이조판서의 증직(贈職)을 받았고 시호(諡號)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저서(著書)로 ꡔ겸암일고(謙菴逸稿)ꡕ가 있다.


3) 류성룡(柳成龍) 서애(西厓)이다. 나라에서 불천위로 결정하였다. 조선의 문신 학자로 중종37년(1542)에 나서 선조40년(1607)에 졸하였다.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인데 관찰사 류중영의 둘째 아들이자 겸암의 아우이다.
이퇴계의 문인으로 명종19년에 사마시(司馬讀)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의 관직을 시작으로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그후 대제학, 관찰사, 대사간, 도승지, 예조 와 이조판서를 지냈고 우의정으로 광국공신(匡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임란 때는 영의정에 올라 도체찰사를 겸하면서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입상출장(入相出將)하여 구해 낸 명재상(名宰相)이었다.

1604년에는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冊錄)되었으며 도학, 문장, 덕행, 글씨로 이름떨친 분으로 특히 영남유생들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위패를 모셨고 시호(諡號)는 문충(文忠)공이다. 저서는 ꡔ서애집(西厓集)ꡕ, ꡔ징비록(懲鐵錄)ꡕ 등 무수히 많다.


4) 류경심(柳景深) 귀촌(龜村)이다. 도회에서 결정됐다. 선생은 중종11년(1516)에 나서 선조(宣祖)4년(1977)에 졸(卒)하였다.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태호(太湖) 호는 귀촌(龜村)이다. 정랑 공권의 아들로 서애의 종숙(從叔)이다.

1544년 생원으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 정자의 관직을 지냈고 명종1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뽑혀 수찬(修鱗), 회인(懷仁)현감, 정주목사, 종성부사, 광주목사 등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 왔으며 예조참판, 대사헌을 역임하다 평안도 관찬사로 재직중 서거(逝去)했다. 저서로는 귀촌(龜村)집이 있다.







  • 나의쇼핑정보
  • 장바구니
  • 배송조회
  • 오늘본상품
  • 없음
  • 상단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