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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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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류충현약용버섯 작성일05-12-16 11:11 조회1,6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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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루(映 湖 樓)]
- 恭愍王이 올라서 嘉賞한 곳 -

** [출처/"안동에 왔니껴"(류희걸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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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내에서 대구 방면으로 가는 길 천리 고가도로(高架道路)를 지나 영호대교 건너를 바라보면 맞은편 언덕위에 육중한 몸체를 아름답게도 강물에 드리운채 우뚝솟은 정자가 있으니 여기가 그 유명한 안동의 영호루(映湖樓)다.

도심(都心)을 빠저나와 십분정도 걸으면 갈 수 있고 택시로는 불과 몇분 걸리지 않는다. 진입로 오르막 길은 그리 높지도 않지만 나무 그늘로 덮혀있어 여름철에는 시원하여 산책과 피서에 그만이다. 지금의 영호루는 현대식 콘크리조로 복원(復元)한 근대식 건물이지만 주위 환경이나 루(樓)아래 자연석 축대 사이에 식재한 조경(造景)과 몇구루의 고목사이에 름연하게 자리잡은 누각(樓閣)이야말로 옛날을 연상케 하여준다.

당초 영호루는 시내를 가로지른 당북천(堂北川)이 낙동강(洛東江)과 합수(合水)되는 서쪽 강안(江岸)에 있었으나 갑술[1934]년 수해(水害)에 떠내려 가버리고 없었다. 그후 오랜 세월이 흐른 경술년(1970)에 와서 유림과 뜻있는 분들의 재청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곳 정하동에 새로 복원(復元) 하였다. 규묘는 옛대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집으로 단청(丹靑)을 말끔하게 하였다.

공민왕이 누에 올라 경치를 가상(嘉賞)할 때는 남향(南向)으로 갈라산 문필봉(文筆峰)을 내다 보았지만 지금은 그 정 반대(反對)로 돌아앉아 북향(北向)했으니 안동 시가지(市街地)를 굽어 볼 수 있고 멀리 학가산(鶴駕山)이 한 눈에 들어온다.

뿐만 아니라 안동의 진산(鎭山) 영남산(映南山)과 읍기(邑基)의 좌청룡(左靑龍) 무협(巫峽)이 보이고 우백호(右白虎)의 성산(城山)이 보인다.

영호루는 영남(嶺南)의 삼대루(三大樓)중의 하나로 그 명성(名聲)이 가장 높았던 정자이다. 밀양의 영남루(嶺南樓)는 공민왕(恭愍王)때 지은 건물이고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는 고려 말기의 건물인데 비하여 안동의 영호루는 확실(確實)한 건축 연도는 알 수 없지만 고려(高麗) 충열왕(忠烈王) 때 이미 건축되어 있었던 것이니 삼대루 중에 가장 오래된 건물로 자랑할 만 하다.

안동출신 고려(高麗)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①이 충열왕(忠烈王) 초(初)에 일본(日本) 원정(遠征)으로부터 돌아와 고향에 들러 읊은 시(詩)를 보아 확실(確實)하다.

題 福州 映湖樓
<金方慶>
山水無非 舊眼靑 樓臺亦是 少年情
可隣古國 遺風在 收拾鉉歌 慰我情

<산수는 옛날 같이 푸르고 누대도 역시 그러하니 어릴 적 생각나네. 갸륵하도다 나라 유풍 그대로 있으니 노래불러 내마음 달래어 보자.>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 난을 피하여 안동[福州]에 몽진(蒙塵)하여 그 와중(渦中)에서도 누에 올라 목은 이색 등 여러 신하(臣下)들과 경치를 가상(嘉賞)하였다.

그후 난리가 평정되자 환도(還都)하여 편액을 하사(下賜)하여 지금도 영호루(映湖樓)란 어필(御筆) 현판(懸板)이 걸려 있다. 그리고 누각의 남쪽에 걸린 한글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다.

영호루는 역대 제왕과 자별한 인연으로 광영된 한때를 누린 화려한 경력을 자랑할 만도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하였듯이 우여곡절(迂餘曲折) 또한 많았다.

공민왕15년 겨울에 왕이 친필로 쓴 편액을 보내 옴으로 안동판관 신자전(申子展)이 누각을 다시지어 현판 했으니 그해가 곧 1368년이다. 그 뒤 성종19년(1488)에 퇴락된 루를 부사 김질이 중수한 데 이어 흥체(興替)도 무상했던 그 역정(歷程)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명종2년[정미] 1547. 7 : 홍수로 유실.
명종7년[임자] 1552 : 부사 안준한 이 복원.
선조38년[을사] 1605. 7 : 홍수로 유실.
성종4년[무오] 1678 : 부사 맹주서(孟冑瑞)가 복원.
영조51년[을미] 1776 : 홍수로 유실.
정조12년[무신] 1788 : 부사 신익빈(申益彬)이 복원.
정조16년[임자] 1792 : 홍수로 유실.
정조20년[병진] 1796 : 부사 이집두(李集斗)가 복원.
순조28년[무자] 1828 : 부사 안광직(安光直)이 중수.
철종9년[무오] 1858 : 부사 김유연(金有淵)이 중수.
왜정[갑술년]1934. 7. 23 오전 11시 홍수로 유실되어 앙상한 주초(柱礎)만 남아 있는 채로40년이 지남.
대한민국[경술]1970 : 현재의 자리에 복원(復元) 함.

이렇듯이 영호루는 숱한 애환(哀歡)을 지닌 채 물에 떠내려 간 것이 5번, 다시 세워지고 중수(重修)하기 7번이었다. 그러다 40년 뒤 8번째에 이르러 복원(復元)되었으니 물가를 피한 정하동 언덕이라 물과는 이제 상관(相關)없게 되어 다행이다.
그러나 목조가 아닌 철근 시멘트 집으로 복원된 것이 아쉬움을 남게 한다.

[공민왕 몽진(蒙塵)] 왕이 난을 피하여 왕자와 비빈 그리고 조신들과 함께 안동에 몽진한 해는 1361년[신축] 11 월 이였다. 당시 읍호가 복주(福州)였던 안동땅에 순행(巡幸)하여 묘주(廟主)를 향교에 모시고 영호루에 올라 드디어 배를 타고 노닐며 구경하고 호수(湖水)가에서 그대로 활쏘기를 즐겼다. 안렴사(安廉使)가 왕께 음식을 대접하니 구경꾼들이 담처럼 둘러 섰는데 혹자는 소매에 눈물을 딱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참언(讖言)을 외우고 탄식해 말을 하기를

갑자기 남쪽의 한도적이 와우봉에 깊숙이 들어온다.
그래서 소가 크게우니 용은 바다를 떠나 얕은물 맑은
파도에 희롱(戱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더니 오늘에
서야 바로 그런 현장을 목격하는구나! 하였다.

어쨌거나 왕이 몽진(蒙塵)함은 나라의 슬픈 사연이지만 안동으로서는 왕을 직접 백성들이 배알(拜謁)할 수 있고 충성을 다 할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機會)로 ‘다행스런 일이다’라고 표현(表現)해도 될런지 모르겠다.

그때 공민왕은 남으로 순행(巡幸)하여 처음 청주와 광주의 재를 넘을 때 난리에 놀란 고을의 수령(守令)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고 백성(百姓)들 마저도 겁에 질여 손발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복주(福州)는 그렇지 않았다. 왕이 복주에 어가를 머무르게 된 것은 지리적 측면과 인맥(人脈)에도 관련이 있었지만 그보다도 복주의 백성들이 고려 태조 때부터 충성을 다했던 까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충성을 다한 백성이나 충신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정평공 손홍량(孫洪亮)과 송안군 이자수(李子脩)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왕은 전쟁 와중(渦中)에서도 편안하게 영호루에 올라 경치를 가상(嘉賞)할 수 있었고 또 낙동강 뱃놀이와 활쏘기도 마음껏 즐겼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때 왕이 뱃놀이를 했다 함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무슨 이유로 11월 추운 겨울에, 그것도 앝은 물이라면 어름이 얼어 있었을 터인데 어째서 뱃놀이한 것을 강조(强調)했을가? 알송 달송한 역사의 기록이다. 이 대목은 차치(且置)하고 옛날에 들었다는 요참(謠讖)이 무었인지 알아 보기로 하자.

[요참(謠讖)] 요참이란 옛날 사람들이 대개(大蓋)는 동요(童謠)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아이들의 입을 통하여 불려 지므로 아이의 노래 즉 동요라고 할 수 있으나 현대의 동요와는 뜻이 다르다. 오늘날 동요는 문예(文藝)의 한 부분으로 취급되어 그 결과(結果) 면에서는 옛날과 의미를 달리 한다는 것이다.

요참(謠讖)은 “하늘의 형혹성이 동자(童子)로 변하여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여 뭇사람들은 이를 매우 중시하였다. 이 노래는 골목의 어린이들이 무심코 부르지만 장차 닥쳐올 어떤 변고(變故)를 사전에 알려주는 일종의 예언(豫言)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요로 통하는 요참들은 멀리 신라(新羅) 때부터 조선조(朝鮮朝)에 이르기까지 심심찮게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얼려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란 서동요가 그것이고 <미나리는 사시사철, 장다리는 봄한철> 이 동요는 조선 숙종(肅宗) 당시 장희빈의 몰락(沒落)을 의미(意味)하는 요참이었다.

<영호루 요참>은 어떤 것일가? 먼저 영가지(永嘉誌) 기록(記錄)부터 더듬어 보자.

映湖樓 在府南五里 恭愍王 南狩 至福州 奉廟主于鄕校
幸映湖樓 遂乘舟遊賞 仍射於 湖邊 按廉使享王觀者 如堵
或有返被 興嗟者 或誦讖而嘆曰 謠讖 古聞其言 今見其驗

영호루는 부의 남쪽 5리에 있는데 공민왕이 순행 복주에 머물러 영호루에 올라 가상(嘉賞)하였고 앞 여울에서 뱃놀이를 했는데 강언덕에서 활을 쏠 때면 주위에 모여든 사람은 성을 이루었다. 그중 어떤 사람은 예전에 그말[요참]을 들었더니 오늘에서야 그 징험을 보는구나 라고 탄식하면서 돌아섰다.

그 사람이 전에 들었다는 요참(謠讖)은 바로 다음과 같다

忽有一南寇 深入臥牛峰 又云 牛大 吼龍離海淺水 弄靑波

갑자기 한 남구가 와우봉 깊숙이 들어오니 소가 크게 울고 용은 바다를 떠나 얕은 물결에서 희롱하는구나!
이는 그냥 읽어서는 영호루와 관련된 요참이라고 이해하기 어렵다. 좀더 깊이 풀이를 해 보면 금방 알게 된다.

먼저 <남구(南寇)>는 남적이란 뜻이다. 남쪽방향의 색은 오행으로 볼 때 붉은색이다. 그래서 남구는 홍건적(紅巾賊)을 의미한다. 다음 <소가 크게 운다>는 그 해가 바로 신축년 이다. 소의 해에 왕이 피난을 간다. 또 <와우봉>은 소가 누워 있는 봉우리로 즉 신축년(辛丑年)을 뜻하니 소의 해는 평온(平溫)하고 한가(閑暇)한 해인데 이런 변고(變故)가 생기니 “소가 운다”로 표현(表現)된 것이다.

<용>은 임금이고 <이해(離海)>는 용이 바다를 떠난다는 말이니 곧 임금이 용상을 떠난다는 뜻이다. 다음에 <잔수청파(淺水靑波)>는 잔잔한 맑은 물 즉 영호루앞 낙동강의 잔잔한 개울이다. <희롱(戱弄)한다>는 시름을 달랜다는 말이니 이를 종합해 보면 “고려 공민왕은 신축년에 홍건적 난을 피하여 복주땅 영호루에 오르고 그앞 여울에서 놀게 된다”라고 함축(含蓄)할 수 있다.
이처럼 아이들의 입을 통하여 오르내린 동요와 요참들은 우리에게 중대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요참이 알려준 고난(苦難)의 변고(變故)는 국가적(國家的)으론 왕이 파천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하겠지만 우리 안동인으로 보아서는 <영호루 요참>이라면 백성들은 직접 왕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충성을 다해 고을의 이름이 복주에서 다시 안동(安東)이라 회복(回復) 되었으며 그것도 부(府)로 승격. 대도호부(大都護府)가 된 것이다.

이로써 안동의 문화유적(文化遺蹟)들은 공민왕과 관련된 것이 많다. <안동웅부> 현판이 그것이니 공민왕의 친필이다. 이 현판은 안동군청 현관에 계첨되어 있었으나 시․군 통합(統合)으로 군청 청사(廳舍)를 철거(撤去)하는 바람에 현판을 내려 지금은 안동민속박물관(安東民俗博物館)에 보관(保管) 전시(展示)하여 언제라도 볼 수가 있다.

[명현(名賢)들의 시판(詩板)] 영호루의 게판(揭板) 수는 문헌(文獻)에 있는 것만을 조사(調査)한 바 현판(懸板) 2개, 기문(記文) 6개, 시(詩) 40점(영호루시 39, 누선시 1) 제영(題詠) 7점 모두 65편이다. 그러나 지금의 영호루(映湖樓)에 걸려 있는 시판은 15점이다. 그 중 가장 큰 게판(揭板)은 <洛東上流 江左名樓> 라고 쓴 전 안동부사(安東府使) 김학순(金學淳)의 글이다.

※ 참고[註]

1.홍건적(紅巾賊) : 원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일어난 도적, 일명 홍적, 홍두적이라고도 한다. 이는 붉은 수건으로 휘장한 까닭이다.

2.공민왕(恭愍王) : (1330~1374) 고려 31대 임금. 휘는 전(顚), 호는 이재(怡齋) 또는 익당(益堂). 충숙왕의 둘째 아들. 강능대군에 봉해졌다. 1341년 원나라에 갔다가 원의 위왕(魏王)의 딸 노국 대장 공주를 비(妃)로 맞았고 원나라 지시에 따라 충정왕(忠定王)을 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글씨와 그림에 능했는데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가 유명하다.

3.지리적(地理的) 측면(側面) : 복주는 거진(巨鎭)이다. 산높고 물맑다. 바다와 멀리 떨어져 산지가 둘러쌓인 분지(盆地)다. 낙동강이 가로 질려 요충(要衝)지다.[참고문헌 :김호종, 「공민왕 안동몽진 연구」]

4.인맥(人脈)적 측면(側面) : [동논문] 공민왕 몽진시에 호종(扈從)한 신하는 모두 28명이다. 그중 경상도 지명을 본관(本貫)으로한 사람이 10명이다. 이들이 전란(戰亂)의 긴박(緊迫)한 터를 당하여 비교적 지역에 익숙했던 자기의 고향을 택하도록 몽진(蒙塵)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참고] 인근(隣近)의 유적(遺蹟) : 추강 김지섭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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