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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계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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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류충현약용버섯 작성일05-12-16 11:04 조회1,4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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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계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 175 호 -
** [출처/"안동에 왔니껴"(류희걸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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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는 우리나라 은행나무로서는 가장 큰 것으로 천연기념물 제175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은행을 행자(杏子)목, 또는 공손수(公孫樹)라고도 한다. 조선 선조때 훈련대장을 지낸 송암(松庵) 탁순창(卓順昌)공이 임란 이후 낙향하여 이 나무에 단을 모으고 행정계(杏亭契)를 조직하여 벗들과 함께 7월달 그늘 밑에서 유흥을 즐기던 곳이다. 임하댐 수몰지구에 있어 지상 15m 높이로 성토하고 상식했는데 그 생육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 용계의 광산 탁씨(光山卓氏)





고려 선종(宣宗)때 학행으로 태사(太師)를 지내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진 탁지엽(卓之葉)을 시조(始祖)로 하는 광산 탁씨는 고려에 이어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문장, 학문, 벼슬로 크게 울린 인물이 연면(連綿)히 배출되어 명문의 지체를 누려왔다.

그 한 갈래가 안동에 입향하기는 조선조 중기인데 선조때 훈련대장을 지낸 탁순창(卓順昌)공에 의해서이다. 그는 선조 임금을 호위하여 심력을 다한 공으로 훈련대장에 오르고 그후 안동으로 은퇴한 그는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문인으로 세조때 문과에 올라 김종직(金宗直), 조위(曺偉) 등 거유(巨儒)들과 학문으로 깊이 사귀였던 탁중(卓中)의 현손이다.

안동에 뿌리내린 이후로는 가문이 떨치지를 못한 편이어서 순창의 아들 세형(世亨)이 어모장군(禦侮將軍), 손자 홍례(弘禮)가 부장(部將), 홍인(弘仁)이 진사, 홍문(弘文)이 참봉, 홍필(弘弼)은 정노위(定虜衛)를 지냈다. 길안의 구수(九水)에는 세덕사(世德祠)를 세워 탁광무(卓光茂)와 죽정(竹亭) 탁신(卓愼) 부자(父子)의 위패를 봉안하고 해마다 제사 하고 있다.


▣ 용계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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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행나무는 자연생으로 수령은 약 700년을 넘는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높이 37m, 둘레 14m, 수간폭 33m로 웅자(雄姿)를 자랑하고 있다. 조선 선조(宣祖)때 탁순창(卓順昌)공이 훈련대장(訓練大長)을 역임하다가 낙향(落鄕)하여 이 은행나무에 단을 모으고 벗과 더불어 행정계(杏亭契)를 조직하고 매년 7월에 나무그늘에서 유흥(遊興)을 즐겼다고 한다.

이 나무는 영험이 많아 다른 이름으로는 신목(神木), 또는 덕목(德木)이라고 한다. 임하댐 수몰로 현위치에서 지상 15m 높이의 축대(築臺)위에 상식(上植)하였다. 옛부터 나무는 고목이면서도 어느 한가지 썩은 곳이 없고 모두가 싱싱하여 무성(茂盛)한 것이 나무의 특징이며 1년에 은행 알을 30두 정도를 수확(收穫)하였다.


원래 은행나무는 자웅(雌雄)이 서로 마주 보아야만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숫 나무 없이 단 한 그루면서도 은행이 그렇게 많이 열리는 것은 나무아래 맑은 냇물이 있어 그물 속의 자기 모습을 착각(錯覺)하여 수나무로 알고 은행을 열게 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나무는 일명 덕목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나무에 올라갔던 사람이 나무를 해치지 않으면 떨어져도 다치지 않게 하고 또 나라에 변고가 있을적 마다 울어서 예언(豫言)해 준다는 것이다.

한일합방 때의 국치(國恥)를 못내 서러워 울었고, 6.25사변(事變) 때도 울었으며 10.26사태(事態)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서거(逝去) 할 때도 울었다고 한다. 또 병마(病魔)가 퍼질 때도 울어주고 날이 가물어도 운다는 신목(神木)으로도 유명하다.

이렇듯 유일한 덕목을 임하댐 담수(潭水)로 수장(水葬)시킬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이 나무는 국가지정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매우 신경을 썼으니 결과는 이식(移植)에 성공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무를 이식(移植)코자 전문가(專門家)의 자문(諮問)을 받아본 결과 수몰선(水沒線) 밖으로 이식하려면 무게가 너무 무거워 장비(裝備)가 국내에 없고, 있다손 치더라도 중장비(重裝備)가 들어갈 도로도 없으므로 불가능하다고 판결이 났다. 따라서 제2안으로 나무를 그 자리에서 지상(地上) 15m 위로 상식(上植)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작업도 만만찮고 전문가도 없어 걱정했으나 천우신조(天佑神助)로 혜성(彗星)같이 나타난 이철호(李喆鎬)란 분이 있었다. 그는 대지개발 주식회사 사장이다. 그 회사는 수목이식(樹木移植)을 전문으로 다루는 업체로 <생명토>란 특허품 소지자로 나무 이식에는 도사(道士)라고 본인은 자부하였다. 지금 청와대(靑瓦臺)에 있는 대형 소나무도 자기가 옮겼다고 자랑하면서 이 사업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학계(學界)에서는 그를 의심하였다. 이식비(移植費)가 10억을 넘는데 멋대로 옮겨 심어 몇 년 가지를 못하고 죽을 것에 대비하여 조건을 붙일 수밖에……? 퍽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신에게 공사를 맡기되 공기(工期)는 3년으로 하며 이식한 뒤 하자(瑕疵)기간은 6년[보통 하자기간은 2~3년]으로 하고 그 기간 내에 나무가 고사(枯死)한다면 공사비 전액을 변상(辨償)해야 한다”는 조건을 설정(設定)하고 계약(契約)하였다.

물론 안동군수와 계약되었고 감독도 안동군 공보실에서 수행하게 되었다. 계약서에는 공증서(公證書)를 첨부하였다. 내용은 <하자보증 기간 6년 내에 고사하면 공사비 전액을 변상한다>는 검찰청 검사가 인정하는 공증서인 것이다.

나는 그때 이 사업을 추진하는 담당 계장이었다. 처음부터 이식에 관한 업무와 사업결정의 진행을 맡은 실무자였기 때문에 공사가 착공되던 그날 기공식 행사에 고사(告祀) 축문(祝文)도 내가 썼고 고축(告祝)도 내가 하였다. 경향 각처(各處)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1990년 11월 6일 드디어 착공식(着工式)이 거행되었다.

그때 고사의 제주(祭主)는 이철호[대지개발 사장] 축관(祝官)은 류희걸[문화재계장]로 결정되어 고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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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由祭 祝文>



유세차 경오 9월 19일 11시 주식회사 대지개발 대표 이철호는 업드려 신께 감히 고하나이다.

용계 은행나무는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175호로 보호해 오던중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애석하게도 수몰지역에 위치하므로 나무를 그냥 수장시켜 버릴 수가 없어 백방으로 연구검토와 심사숙고 끝에 이 나무를 현 위치에서 지표 15미터로 성토하고 그위에 상식키로 나라에서 방침을 정했습니다.

이에 이철호는 생애의 명예를 걸고 이나무를 기어코 완전하게 이식하여 영원히 생존 활착되도록 할 것을 맹서하면서 나라로부터 이 작업을 위임받아 오늘 착공하게 되었습니다.
삽질을 하고 나무의 뿌리를 자르더라도 덕목이요 신목으로 존경받는 위대한 은행나무는 괴롭고 아픔을 참아 주시기를 두 손 모아 비옵나이다.

오! 신이여! 이 은행 나무를 살리고자 애써 노력하는 대지개발에 영험을 주시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막중한 사업을 주관하는 안동군에도 무궁한 발전을 가져 오도록 도와 주시기를 간청 하나이다.

이처럼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정성어린 제물을 차려 고축하오니 나무신께서는 흠향하시옵고 굽어 살피셔서 본 사업이 무사 안전한 가운데 마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무를 상식 완료한 후에도 아무 탈 없이 잘 자라도록 하여 주시고 종전 못지 않게 더욱더 무성해지도록 하여 주시기를 바라오며 경건한 마음으로 엄숙히 고사를 올립니다.

1990년 9월 19일

대지개발주식회사 대표 이 철 호 감고

이렇게 작업은 시작되어 3년만인 1993년에 드디어 이식을 완료하고 성대한 준공식을 가졌다. 그때 나는 안동시립민속박물관으로 온지 벌써 2년이 되었고 타 관청에 근무하므로 초청이 없어 준공식에는 참석하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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