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충현약용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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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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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류충현약용버섯 작성일05-12-16 11:04 조회1,748회 댓글0건

본문


[天燈山 鳳停寺(국보 제15호)]
-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다녀간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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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18일 촬영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 봉정사

카메라 Canon EOS-1NHS
렌즈 28-70 & 70-200
필름 : REALA 100
2004년 4월18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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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는 조계종 16교구인 고운사의 말사로 안동시 서후면 태장동 천등산 품에 안겨져 있다. 봉정사는 672년(신라 문무왕12년)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義相大師)의 제자 능인대덕(能仁大德)이 창건한 안동 제일의 고찰이다. 의상대사는 어느날 영주 부석사에서 하얀 종이학을 접어 하늘 높이 날려 보냈다. 종이학은 가뿐하게 하늘을 타고 올랐다가 불심(佛心)의 기운이 흐르고 있는 땅에 내려 앉았다. 이곳에 의상의 제자인 능인대덕이 절을 창건하니 바로 봉정사이다. 경내에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3층 석탑과 고려말 조선초에 건립된 대웅전과 조선초에 만들어진 화엄강당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대웅전의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양쪽에 각각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제보살이 모셔져 있다. 얼마전에는 불상 뒤에서 후불벽화(불상 뒤 벽체에 그린 불화)가 발견되어 관심을 모으기도 했는데 폭이 4미터가 넘는 이 거대한 벽화는 조선초기 대웅전이 지어지면서 1428년 제작된 국내 최고의 것으로 밝혀졌다. 대웅전을 해체 수리하던 중 지붕 속 종보받침 장설에서 \'1428년에 미륵하생도를 그렸다\'는 묵서가 발견됨으로서 그 동안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전남 강진의 무위사 극락전 후불벽화(1476년) 보다 48년 앞선 것임이 최근 확인되었다. 극락전 옆 내리막길에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으며, 이 봉정사는 1999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다녀감으로서 하회마을, 도산서원과 더불어 안동의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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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에 대하여*
대웅전은 건립 연대는 자세한 사료가 없어서 정확한 연대를 알지 못하나 건물의 일부를 해체하여 수리할 때 일부분의 묵서명이 발견되어 추정이 가능하다. 이 대웅전은 현존하는 다포계 건물로는 최고의 물이다. 대웅전은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자연석의 막돌허튼층 쌓기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건물이다. 겹치마 팔작지붕에 다포양식을 한 이 건물은 산 중턱에 세워진 건물이면서도 평야를 끼고 있는 지역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원기둥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려 놓았으며, 주간이 넓고 오포작(五包作)이라서 포벽(包壁)이 넓게 보이는 반면 기둥은 짧게 보여 매우 안정감을 준다.

공포의 짜임은 내외 모두 2출목으로 외부쪽으로는 쇠서형이며 내부족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짜여 그 수법이 고려말 조선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예는 툇간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전면 3칸은 전부 개방하고 문비를 설치하였는데 궁판 받친 띠살무늬의 사분함(四分閤)이다. 이 문작은 앞의 쪽마루와 함께 후대의 구조물이다. 기둥위의 공포도 간의 높이를 낮게 하여 기둥의 기초로부터 처마 끝까지의 간격이 다른 다포집에 비하여 적다.

가구(架構)는 일고주구량가(一高柱九樑架)인데 천장이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어서 상부 가구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지붕은 팔작으로 비교적 처마 깊이가 깊고, 처마는 겹처마로서 네 귀의 추녀끝에는 활주를 받쳐 추녀마루를 지탱하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널마루를 전면에 깔고 내부 고주(高柱)를 이용하여 후불벽(後佛壁)을 만들었고 고주 앞에는 불단을 짜서 불상을 안치하였다. 불단은 150cm정도의 높이로 만들고 청판에는 연화문을 조각하여 장엄하였다. 불단 위에 연화좌를 놓고 삼존불을 봉안하였다. 주불인 석가모니불은 높이 150cm정도이고 좌 우 협시불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높이가 130cm정도 크기이다.

불단 위쪽은 아름다운 소란반자를 설비하고 그 중심에 따로 닫집을 대신하여 보계를 구성하여 장엄미를 추구하였다. 보개의 천장에는 구름이 둥실 떠 있는 하늘을 두 마리의 황룡과 백룡이 날아가는 모습을 그려 하늘의 신비함과 권능을 표현하였다. 보개 아래의 본존상 뒷벽에는 불벽(佛壁)을 조성하였다. 대량(大樑)에 세운 간주(間柱)를 의지하여 벽체를 구성한다. 간주에는 아래 위로 주의(柱衣)를 입히고 그 사이에 기둥을 감싸안으며 상승하는 용을 장엄하게 그렸다. 불벽의 앞쪽에는 후불탱화인 영산회산도(靈山會相圖)를 걸었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10대 제자 사천왕 등을 배치한다.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는 강희(康熙) 52년(1713) 윤(潤) 5월 1일 제작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380cm, 세로 360cm이다.

후불탱화를 보수하기 위하여 불사를 할 때에 희귀한 벽화 형태의 후불탱화가 하나 더 발견된 이 탱화는 수미단과 보개를 연결하는 주불 뒷벽에 채색으로 그려진 가로 세로 약 417cm 크기이다. 석가불이 영취산에서 관무량수경을 설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의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 변상도에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꽃비의 표현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고려 변상도의 상단부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구도, 벽화 테두리의 연화 당초문의 색상과 기법이 건물 내부 단청과 유사한 점, 벽화가 훼손되어 1712년에 새로이 후불탱화를 제작하여 봉안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대웅전 초창 때 그려진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초기 불화자료가 희귀하고, 조선 전기 이전의 후불벽화도 1476년에 그려진 전남 강진의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 3존도가 유일한 것임을 감안할 때, 이번에 발견된 봉정사 대웅전 후불벽화는 우리 나라 불화의 도상과 양식 연구 뿐 아니라 회화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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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에 대하여*

극락전은 현존하는 우리 나라의 목조건축 중 최고(最古)의 건물이다.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柱心包)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극락전 해체 보수공사 때에 1625(인조3)에 작성한 상량문을 발견하였다. 이 상량문은 \'천계 5년 3월\'에 중수하면서 작성한 공사 기록인데, \'前中創至正 二十三年 癸卯 三月日\'이라는 구절이 있다. 중창은 중창(重創)을 의미하며 지정 23년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가 개창하였다 하였으므로 상량문의 신라 때에 창건은 이를 가리킨다. 공민왕 12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은 이보다 오래 전에 이미 건물이 조영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3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갑석을 올리고 크기가 다른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4칸의 구조이다. 이 건물은 감실형으로 주벽이 토벽으로 밀폐되고 따로 낸 문얼굴에 널빤지 2장을 사용한 문짝을 달았고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광창이 있다. 공포는 외 1출목 주삼포의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가구는 9량가인데 그 구성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고주 2본이 뒤쪽에 있다. 그러나 평주상의 대량과 퇴량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높이로 만들어진 특색을 보인다. 다른 법당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이다. 대량은 단면이 청자매병의 윤곽을 연상시킨다. 굵지않은 목재를 홍량으로 다듬어 걸었는데 이로 인하여 중첩하는 부재가 거듭됨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맛을 덜고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건물의 내부는 바닥에 방전을 깔고 뒤쪽에만 2개의 고주를 세워 그 사이에 이동식 불단을 설치하였다. 불단 위에는 불상과 불화를 봉안하였는데, 그 주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몸을 짜맞춘 뒤 다포식 구성을 지닌 지붕을 씌워 집을 마련하였다.

극락전이 지닌 몇 가지 특징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까지 계승된 이른바 고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기둥머리와 소로의 굽이 곡면으로 내반되어 있는 점,대들보 위에 산 모양에 가까운 복화반대공을 배열하고 있는 점, 점차 끝에 쇠서를 두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봉정사 극락전의 경우에는 아미타불을 전각의 가운데에 이동식 불단을 설치하여 그 위에 봉안하고 있고 좌 우 협시보살은 모셔져 있지 않다. 단지 불단에는 높이 100cm정돈인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지만 불단의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 우 협시보살인 고나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高宗)37년인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는 가로 195cm, 세로176cm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5cm폭의 흰 테두리를 두르고 중앙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 우 대칭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그려 전체적으로는 아미타불의 관배를 감싸듯이 배치된 구도를 가지고 있다. 탱화의 표현 기법은 본존불의 경우에는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고 상체보다 두부(頭部)를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앞까지 들어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었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왼손은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는데 손가락 끝이 뾰족하지만 우아한 곡선미를 간직하고 있다. 광배는 원형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그렸다.

좌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은 본존불을 향하여 약간 틀어 앉은 자세를 취하고 머리에는 화불(化佛)이 그려진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고 왼손은 연꽃 줄기를 잡고 있다. 우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대칭되는 자세를 취하고 보관(寶冠)에 보병(寶甁)을 표시하고 경책을 받쳐들고 있다. 본존불의 두광 좌 우에 합장한 아난과 가섭존자가 상반신만 표현되어 있고, 그 위로 화면의 여백없이 구름을 화려하게 그렸으며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는 광선을 그려넣었다. 화면 하단 중앙에도 한덩이 구름을 그려서 아미타여래가 극락세계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삼층석탑에 대하여*

극락전의 정면에 있는 고려시대 중엽에 조성된 탑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중 기단의 방형 석탑으로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폭이 좁으며 각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이 약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약간 둔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 부분은 있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탑의 총 높이는 318cm이다. 2층 기단(基壇)을 쌓아 탑의 토대를 마련하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아래·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기단에 비해 폭이 좁아진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 크기가 위로 갈수록 적당하게 줄어들면서도, 폭의 변화는 적다. 지붕돌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고 두툼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일부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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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당에 관하여

보물 제449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금당은 극락전의 앞 서쪽에 세워져 있다. 이 건물은 동쪽에 있는 화엄강당과 같은 시기에 같은 목수에 의하여 건축되어 조선시대 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화엄강당과는 달리 기둥과 기둥의 간격이 좁고 기둥의 키가 높은 구조를 하고 있어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자연적으로 쌓은 축대 위에 장대석으로 낮은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을 놓았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공포는 익공에 가까운 주심초계이며 가구는 고주가 없는 7량가이다. 정면 3칸에는 칸마다 2짝으로 된 띠살문을 달았다. 어칸 문의 크기는 중앙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어 좌 우의 띠살문보다 높이가 조금 더 크다. 측면과 뒷면은 모두 벽으로 막았고 뒷면의 좌 우 협칸에 외문의 띠살문을 달았다. 공포의 구성은 기둥 위에만 포작을 짜올린 주심포계 구조를 택하고 있으며 주두밑에 헛첨자를 끼우고 그 위에 주주 위에서 나온 살미첨자를 포개 놓았다. 이 위에 도리 방향으로 일출목의 행공첨자를 얹어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는 관계로 익공계로 이해되기도 한다. 측면의 가구는 벽 중앙에 귀기둥보다 약간 긴 원형의 고주를 놓아 대들보를 받치고, 대들보 위에 짧은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쳤으며, 이 위에 다시 짧은 기둥을 세워서 마루도리를 떠받치고 있다. 도리와 장혀를 길게 밖으로 빼내어서 측면 지붕에 깊이감을 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화엄강당에는 대들보와 마루보 사이에 조그만 살창을 두고 있지만 고금당에는 없다.

이것은 화엄강단이 판고 등으로 쓰이던 건물이어서 측벽에 살대를 꽃은 통풍창이 있는데 반하여 고금당은 선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살창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좌측면에는 아궁이를 내어 난방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 내부는 3칸 통으로 공간 활용을 넓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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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루에 관하여**

누문은 대부분 이층으로 건축되며 아래층은 사찰의 중정으로 통하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하며, 윗층은 산사의 전망을 감상하거나 목어(木魚), 운판(雲版), 범종(梵鐘), 법고(法鼓)등을 걸 수 있는 종루(鐘樓)나 고루(鼓樓)의 기능을 겸하기도 한다.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을 달아 가구의 노출을 방지하고 비나 바람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이층 누각식 건물로 일층인 아랫부분은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주츳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우하주는 누상주에서 사용한 것보다 더 굵은 부재를 사용하여 견고하게 보이며 사찰의 중정으로 오르는 통로의 구실을 한다. 만세루는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으며 법고와 목어 판이 놓여져 있어 예불을 알리는 고루로서의 기능을 한다. 목어는 나무를 깎아서 잉어 모양을 만들고 속을 파내어 비게 한 다음 그 속을 막대로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불구이다. 염불과 독경이나 예배할 때 쓰이는 것으로 물속에 사는 고기들을 구원하고 수중중생의 해탈을 위하여 두드리는 것이다. 불사에 쓰이는 이 기구를 목어라고 이름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고 있다.

「옛날 덕이 높은 고승의 제자 하나가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속된 생활을 하다가 그만 몹쓸 병에 걸려 죽었다. 어느날 스승이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데 등에 커다란 나무가 있는 물고기가 나타나 전생의 죄를 참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등에 달린 나무를 없애주기를 간청하는 것이었다. 그 물고기는 다름아닌 말썽을 부린 제자가 물고기로 다시 태어나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이었다. 스승은 가엾게 생각하여 수륙재를 베풀어 등에 난 나무를 없애주었다. 그날 밤 제자는 스승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업보를 벗겨준 것에 고마움을 표하고 자신의 등에 난 나무를 깍아 물고기 형상을 만들고 소리를 내면 그 소리를 듣는 수행자들에세 좋은 교훈을 주세 될 것인동시에 물에 사는 물고기들을 구원하는 소리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스승은 제자의 말대로 목어를 만들고 여러 행사에 두루 쓰이는 법구로 삼았다.」고 한다.

민간 신앙에 있어서도 물곡4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장석이나 노리개에 잉어 형상이 새겨지고 장농이나 소품들에도 잉어문양을 많이 사용한다. 이것은 물고기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을 감지 않으므로 물고기의 속성을 따라서 도난을 방지하는 부적으로 주로 사용한다. 불교에 있어서는 수향자들로 하여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를 닦고 정진하라는 뜻으로 물고기 형상의 목어를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법고는 네 발 달린 집승들을 구원하고 해탈하라고 치는 북이다. 북을 받치고 있는 북대는 구름 모양의 형태를 띠고 있다. 운판은 날아 다니는 짐승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구름의 형태로 만들어서 걸어두고 친다. 범종은 지옥에 빠진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울리는 것이다. 이상 네 가지 범종, 운판, 법고, 목어를 사물이라 한다. 누에는 \'덕휘루(德輝樓)\'라는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어 이 누문의 이름이 덕휘루였음을 알 수 있으나 언제 만세루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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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山神) 칠성(七聖) 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당우(堂宇)이다. 삼성은 각각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전통신앙인 삼신신앙과의 습합현상을 살펴볼 수 있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나 불교가 전래된 후 일반 대중에세 포교하기 위한 방편으로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하여 먼저 호법신중이 되었다가 후대에 원래의 성격을 불교 안에서 되찾게 된 것이다. 산신은 가람수호신으로서의 기증과 함께 산속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으로 받들어지며 자식과 재물을 관장하는 신이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가리키는데 별나라의 주군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관장하는 신이다.

독성은 나반존자(那般尊者)라고도 불리며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서 성인의 위치에 올라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한다. 삼성은 모두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들로서 일반 중생들을 위해서 우리의 토착신앙인 삼신신앙을 불교와 습합함으로서 중생 구도의 목적을 띠고 있다. 따라서 건물의 이름을 전(殿)이라 하지 않고 한 단계 격을 낮추어 각(閣)이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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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암에 관하여**

봉정사의 요사인 무량해회에서 동쪽으로 약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영산암의 \'영산\'이란 원래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강설하던 인도 왕사성 근방에 있는 영취산을 말한다. 법화경을 설법할 때의 그 모임을 두고 불교에서는 영취산 위의 모임, 간단히 영산회상이라 하며 이 모임의 장면을 영산회상도라 하여 법당의 후불탱화로 많이 봉안된다. 영산암은 몇 해 전에 우리 영화계에 각광을 받은 바 있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촬영한 장소가 되어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비상한 주목을 받은 곳이다.

이 영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외된 삶의 추한 모습들과 세속에 맞부딪치면서 처절하리 만치 좌절해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면서도 참된 삶의 실체는 시대 상황의 다양한 변수에도 불구하고 역시 불교의 고전적인 해답에 그 실마리가 있다는 것을 뛰어난 영상미로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낡고 퇴락한 암자와 빼어난 자연경관의 조화 속에 노승의 초췌하리만치 비장한 불도의 엄숙함과 진실성을 빼어난 영상미와 절제된 언어로 관객들에게 전달하여 도대체 어느 장소에서 찍었기에 저토록 훌륭한 영상미를 살려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 바 있는데 그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이 영산암이다.

봉정사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덕휘루를 통하여 대웅전과 극락전을 둘러보고 대부분 이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이는 영산암이 스님들의 참선도장인지라 누가 일러주는 경우도 없거니와 요사인 무량해회를 둘러보면 저만치 떨어진 곳에 싸리나무로 담장을 치고 사립문을 쳐 놓아 대개 무엇에 좇긴 듯 급하게 하산을 재촉하여 이곳까지 접근하지 못하고 돌아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열고 자연에 동화되며 산사의 고즈넉함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은 사립문을 지나 요사채 뒤쪽 산자락에 자리잡은 이곳까지 발길이 닿는다. 영산암의 출입문인 낡고 낡은 초라한 우화루 밑을 지나 암자의 안마당에 닿으면 고건축의 미학을 전혀 모르는 문외한도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는 마당의 멋스러움에 넋을 빼앗기게 된다.

마당의 가장자리에 자그마한 동산을 만들어 기암괴석을 옮겨놓고 그 위에 멋스럽게 휘어진 고목인 향나무와 관상수를 비롯하여 계절을 다투며 다양하게 피어나는 꽃나무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각 건물에는 툇마루와 누마루 등이 설치되어 서로 끊어질 듯 이어져 있다. 이러한 것들의 다양함은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재창조하는 신비감마저 느끼게 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일반인들에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찾고 이해하고 느끼는데 많은 도움을 준 유흥준 교수는 이 책 3권에서 봉정사 영산암 마당의 멋스러움을 건축가 승효상이 『내 마음 속의 문화유산 셋』이라는 문화칼럼에 연재한 기사를 인용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 음악에서는 음과 음의 사이, 전통 회화에서는 여백을 더욱 소중하게 여겼던 것처럼 전통 건축에서는 건물 자체가 아니라 방과 방 사이, 건물과 건물 사이가 더욱 중요한 공간이었다. 즉 단일 건물보다는 집합으로서의 건축적 조화가 우선이었던 까닭에 그 집합의 중심에 놓여 있는 비워진 공간인 마당은 우리 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며 개념이 된다. 이 마당은 서양인들이 집과 대립적 요소로 사용한 정원과도 다르며 관상의 대상으로 이용되는 일본의 정원과도 차원을 달리하는 우리의 고유한 건축 언어이며 귀중한 정신적 문화 유산인 것이다.

"또한 그는 봉정사가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세 개의 마당 즉 대웅전 앞의 엄숙한 마당, 극락전 앞의 정겨운 마당, 영산암의 감정 표현이 강하게 나타난 복잡한 마당을 통하여 한옥의 멋스러움을 마당을 통하여 느끼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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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역혁에 대하여

영가지에 따르면 \'부 서쪽 30리에 있는 천등산 아래에 있다. 신라시대에 이름난 절이 되었다. 가정 병인년(1566년) 봄에 퇴계 선생께서 절의 동쪽 낙수대 건물에 붙인 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在府西三十里天燈山下羅代爲名刹前有落水-------]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 중 하나인 봉정사의 최초 창건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의 창건이라는 기록과 능인대덕의 창건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대체로 능인대덕의 창건으로 보고 있다.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능인대덕이 수도를 한 후 도력으로 종이 봉을 만들어 날렸는데,이 종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 (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 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 전쟁 때는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사찰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봉정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지닌 곳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봉정사의 역사에 대하여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창건에 관한 사실도 전설에 상당한 부분을 의존하고 있고 그 이후의 역사적 사실도 몇 차례 중수한 것을 제외하면 알 수 있는 사실은 전무한 편이다.

얼마 전까지는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극락전의 옥개부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1972년에 실시된 극락전의 완전한 해체 복원 시에 상량문에서 발견되어 지금까지 한국에서 최고 오래된 목조 건물이 봉정사 극락전 (국보15호)로 인정 받게 되었고 극락전의 건립 연대는 적어도 12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2000년,2월 대웅전 지붕보수공사 과정에서 사찰 창건 연대를 확인해주는 상량문 과 대웅전 내 목조 불단에서 고려말에 제작했다는 묵서가 발견돼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이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바뀔 것으로 확실시되고 있다. 대웅전 지붕의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북서쪽 종보 보아지에서 발견된 [宣德十年乙卯八月初一日書](중국연호인 선덕 10년 <1435년, 조선조 세종 17년>에 쓴 글) 라고 적힌 상량문은 경상도 관찰출척사가 직접 썼고 자사 新羅代五百之余年至 乙卯年分法堂重倉(신라대 창건 이후 500여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다)이라는 사찰 건축연대를 밝혀주는 내용과 당시 봉정사의 사찰 규모 등이 자세히 기록돼있어 대웅전 창건 연대가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함께 대웅전 내 불단 바닥 우측에서 [辛丑支正二十一年 鳳亭寺 啄子造成 上壇有覺澄 化主戒珠 朴宰巨](지정 21년 <1361년,공민왕 10년>에 탁자를 제작,시주하다.시주자 박재거)라고 적힌 묵서명도 처음 확인,대웅전 불단이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임이 판명되었다. 한편 새로 발견된 상량문에는 2츠 누각 신축,단청을 한 시기,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사찰규모 등을 알려주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초 당시 봉정사는 팔만 대장경을 보융하고 500여결(1만여평)의 논밭에다 안거스님100여명에 200여명의 노비까지 거느린 모두 75칸의 대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험하지도 않아 잠시 바쁜 도심을 떠나 한적한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좋은 곳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가진 이 곳은 우리 안동사람들에게는 자랑스러운 곳이기도 하고 요즘 사람들이 갈망하는 맑은 물,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점차 번잡해 가는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조용한 한국산중 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어 신앙인에게는 더없이 좋은 수련의 장소이기도 하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 더욱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하고,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하였다. 그 뒤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보물 제55인 대웅전,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이 있다. 특히, 고려태조와 공민왕, 최근에는 영국의 여왕이 다녀가기도한 아름다운 사찰이다.

천등산에 대하여

천등산 은 옛적에는 대망산이라 불렀다. 절 뒷산에는 거무스름한 바위가 산정을 누르고 앉아 있는데 그 바위 밑에 천등굴이라 부르는 굴이 있다. 능인대사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법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대망산 바위굴에서 계절이 지나는 것도 잊고 하루에 한끼 생식을 하며 도를 닦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휘몰아치는겨울에도 "나무아미타불", 찌는 듯한 더위의 여름에도 "나무아미타불", 마음과 몸을 나른하게 풀어지게 하고 괴괴한 산속의 무서움과 고독같은 것은 아랑곳 없었다. 이렇게 십년을 줄곧 도를 닦기에 여념이 없던 어느날 밤 홀연히 아리따운 한 여인이 앞에 나타나

"여보세요. 낭군님"

옥을 굴리는 듯 낭낭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미처 능인이 고개를 들기 전에 보드라운 손길이 능인의 손을 살며시 잡지 않는가! 눈을 들어 보니 과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고운 살결에 반듯하나 이마와 까만 눈동자 오똑한 콧날, 거기에는 지혜와 정열이 샘솟는 것 같아 진정 젊은 능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 했다. 여인은 "낭군님" 다시 한번 맑은 목소리로 능인을 불렀다.

"소녀는 낭군님의 지고하신 덕을 사모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낭군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사옵니다. 부디 낭군님을 모시게 하여 주옵소서."

여인의 음성은 간절하여 가슴을 흔드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능인은 십년을 애써 쌓아온 수련을 한 여인의 간청으로 허물 수 없었다. 능인은 준엄하게 여인을 꾸짖었다. "나는 안일을 원하지 아니하며 오직 대자대비 하신 부처님의 공력을 사모할 뿐 세속의 어떤 기쁨도 바라지 않는다. 썩 물러나 네 집으로 가거라!"

능인의 꾸중에 산도 크르릉 울리는 듯 했다.그러나 여인은 계속 유혹을 하며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능인은 끝내 거절하였으며 오히려 여인에게 깨달음을 주어 돌아가게 했다. 여인이 돌아서자 구름이 몰려 들더니 여인을 사뿐이 들어 하늘로 오르며" 대사는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나는 천상 옥황상제의 명으로 당신의 뜻을 시험코자 하였습니다.이제 그 깊은 뜻을 알게 되었사오니 부디 훌륭한 인재가 되기를 비옵니다." ]

여인이 하늘로 사라지자 그곳에는 산뜻한 기운이 내려오더니 굴 주변을 환히 비추었다. 그때 하늘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또 울려왔다.

"대사, 아직도 수도를 많이 해야 할텐데 굴이 너무 어둡습니다. 옥황상제께서 하늘의 등불 을 보내드리오니 부디 그 불빛으로 더욱 깊은 도를 닦으시기 바라나이다."

그러자 바로 그 바위 위에 커다란 등이 달려 어둠을 쫓고 대낮같이 굴안을 밝혀주고 있었다. 능인은 그 환한 빛의 도움을 받아 더욱 열심히 수련을 하여 드디어 득도하여 위대한 스님이 되었다.하늘에서 내려온 등의 덕택 으로 수도하였다하여 그 굴은 \'천등굴\' 대망산을 \'천등산\'이라 이름지어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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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 관한 자료는 봉정사 홈에서 내용을 참고로 했습니다. http://bongjeongs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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