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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의 불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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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류충현약용버섯 작성일05-12-16 10:50 조회1,4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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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의 불천위(不遷位)



하회에는 4위의 불천위(不遷位)가 있다. 불천위는 부조(不 ))를뜻하는 것인데 신위를 조매하지 않고 영구히 사당에 모신다는 말이다. 대체로 봉제사(奉祭祀)는 4대까지만 하고 5대 즉 고조부 그 이상은 사당에 모시던 신위를 옮겨서 묘소옆에 매장(埋藏)한다. 그래서 유가(儒家)에는 통상 4대 봉사(奉祀)라고 한다.

불천위를 정하는 방법은 공존사직(功存社稷)하고 수업후예(垂業後裔)로 저명한 어른이면 나라에서 부조명회(不 命會)하거나 또는 사림(士林)의 합의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불천위가 있는 집을 종가(宗家)라 칭하고 그 맨끝 손을 종손이라 부른다.
그런데 항간엔 웬만한 집이면 곧장 종손과 종부라고 하는데 이는잘못이다. 4대 봉사집은 종손이 될 수 없고 다만 주손 또는 큰집 주인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 하회에서 불천위로 모시는 어른은 다음과 같다.


1) 류중영(柳仲 ) 입암(立巖)이다. 도회에서 불천위로 결정했다.



선생은 중종10년(1515)에 나서 선조6년(1573)에 졸(卒)하였다.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언우 호는 입암이며 본관은 풍산인데 군수를 지낸 류공작의 아들이다. 중종35년(1540)에 문과에 병과(丙科)로급제 출사(出仕)하여 장령(掌令)을 하고 이어서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했으며 내직(內職)으로는 승지, 경연관이 되었다. 저서는 {입암집(立巖集)}이 있다.


2) 류운룡(柳雲龍) 겸암(謙菴)이다. 역시 도회에서 결정했다.



선생은 중종34년(1539)에 나서 선조34년(1601)에 졸하였다.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菴)인데 관찰사(觀察使)류중영(柳仲 )의 장자이다. 이퇴계의 문인으로 선조5년에 음보(蔭補)로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가 되었고 풍저창직장(豊儲倉直長)으로서 유능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다.

인동현감, 풍기군수, 원주목사를 지냈는데 졸(卒) 후 이조판서의 증직(贈職)을 받았고 시호(諡號)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저서(著書)로 {겸암일고(謙菴逸稿)}가 있다.


3) 류성룡(柳成龍) 서애(西厓)이다. 나라에서 불천위로 결정하였다.



조선의 문신 학자로 중종37년(1542)에 나서 선조40년(1607)에 졸하였다.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인데 관찰사 류중영의 둘째 아들이자 겸암의 아우이다.

이퇴계의 문인으로 명종19년에 사마시(司馬讀)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의 관직을 시작으로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그후 대제학, 관찰사, 대사간, 도승지, 예조 와 이조판서를 지냈고 우의정으로 광국공신(匡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임란 때는 영의정에 올라 도체찰사를 겸하면서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입상출장(入相出將)하여 구해 낸 명재상(名宰相)이었다.

1604년에는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冊錄)되었으며 도학, 문장, 덕행, 글씨로 이름떨친 분으로 특히 영남유생들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위패를 모셨고 시호(諡號)는 문충(文忠)공이다. 저서는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鐵錄)} 등 무수히 많다.


4) 류경심(柳景深) 귀촌(龜村)이다. 도회에서 결정됐다.



선생은 중종11년(1516)에 나서 선조(宣祖)4년(1977)에 졸(卒)하였다.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태호(太湖) 호는 귀촌(龜村)이다. 정랑 공권의 아들로 서애의 종숙(從叔)이다.

1544년 생원으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 정자의 관직을 지냈고 명종1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뽑혀 수찬(修鱗), 회인(懷仁)현감, 정주목사, 종성부사, 광주목사 등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 왔으며 예조참판, 대사헌을 역임하다 평안도 관찬사로 재직중 서거(逝去)했다. 저서로는 귀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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