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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퇴계선생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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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류충현약용버섯 작성일05-12-12 12:13 조회2,0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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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선생 자명 시

***퇴계는 나면서부터 어리석었다란 말을***


퇴계 선생의 자명(自銘)


DSC00081.JPG

[이퇴계(황)의 초상]

生而大癡 壯而多疾 나면서 어리석고
자라면서 병도 많아
中何嗜學 晩何叨爵 중간에 어쩌다가 학문을 즐겼는데
만년에는 어찌하여 벼슬을 받았던고
學求猶邈 爵辭愈嬰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벼슬은 마다해도 더욱더 주어졌네.
진행지겁 退藏之貞 나아가서는 넘어지고
물러서서는 곧게 감추니
深慙國恩 亶畏聖言 나라은혜 부끄럽고
성현 말씀 두렵구나!
有山㠜㠜 有水源源 산은 높고 또 높으며
물은 깊고 또 깊어라.
婆娑初服 脫略衆訕  관복을 벗어버리니
온갖 비방 다 벗었네.
我思古人 實獲我心 생각건대 옛사람은
내 마음 이미 알겠거늘
寧知來世 不獲今兮 뒷날에 오늘 일을
어찌 몰라줄까 보냐.
憂中有樂 樂中有憂 근심 속에 낙이 있고
낙속에 근심이 있는 법
乘化歸盡 復何求兮 조화타고 자연으로 돌아가니
무얼 다시 구하랴



퇴계 선생 유계(遺戒)



*장례식을 간소하게 하고 국장(國葬)의 예를 이용하지 말라. 예조(禮曺)에서는 전례에 따라 이용할 것을 청 할 것이나 망인(亡人)의 명령이라 청하고 소(疏)를 올려 굳게 사양하라.

*유밀과(油蜜果, 사치스런 제수)를 쓰지 말라.
*비석을 세우지 말라. 그저 조그만 돌에다가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고 내가 지은 명문(銘文)만 새길 것이며, 기고봉 같은 사람이 장황하게 쓰지 않도록 하라.

*저 매화나무 물 줘라.


身退安愚分 몸이 물러나니 어리석은 분수에 마땅하나
學退憂暮境 학문이 퇴보하니 노년이 걱정이다.
溪上始定居 시내위에 비로서 살 곳을 마련하니
臨流日有省 흐르는 물과 더불러 나날이 반성 하고저



퇴계 선생의 경(敬)



의관을 바르게 하고, 눈매를 존엄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가지고 있기를 상제(上帝)를 대하듯 하라.

발가짐은 반드시 무겁게 할 것이며, 손가짐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고, 땅은 가려서 밟아 개미집 두덩까지도 밟지 않도록 돌아서 가라.

문을 나설 때는 손님을 뵙듯해야 하며, 일을 할 때는 제사를 지내듯 조심조심하여, 혹시라도 안이하게 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입다물기를 병마개 막듯이 하고, 잡념 막기를 성곽과 같이하여, 조금도 경솔히 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동쪽을 가지고 서쪽으로 가지 말고, 북쪽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지 말며, 일을 당하여서는 그 일에만 마음을 두어, 그 마음씀이 다른 데로 가지 않도록 하라. 두 가지, 세 가지 일로 마음을 두 갈래 세 갈래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오직 마음이 하나가 되도록 하여, 만가지 변화를 살피도록 하라.

이러한 것을 그치지 않고 일삼아 하는 것을 곧 "경(敬)을 유지함" 즉 "지경(持敬)"이라 하니, 동(動)할 때나 정(靜)할 때나 어그러짐이 없고, 겉과 속이 서로 달라지지 않도록 하라. 잠시라도 틈이 벌어지면 만가지 사욕이 일어나, 불꽃처럼 뜨거워지고 얼음 처럼 차가와 지느니라.

아! 아이들이여! 먹을 갈아 경계하는 글을 쓰나니 깊이 마음에 새겨 두고 공경할 지어다.


석해(石蟹:가재)



負石穿沙自有家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저절로 집이로구나
前行 走足偏多 앞으로 가느라고 아무리 달아나도
옆으로 가니 발이 많으면 무엇에 쓰랴

生涯一 山泉裏 평생을 살아도 한 움큼의 샘물로서
생애가 족한 것을

不問江湖水幾河 바다의 파도치는 많은 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담

嗟爾世上人 아아! 세상 시랍들아

愼勿愛高官 부디 높은 벼슬일랑 좋아하지 말아라.

富貴等浮煙 부귀는 뜬구름과 같고

名譽如飛蠅 명예는 나는 파리와 같더라

獨愛林廬萬差書 숲 속 초당에서 만권의 책을
혼자 즐기면서도
一般心事十年餘 일상의 평범한 마음으로 보내기를
십년이 넘었네

邇來似與源頭會 이즈음에야 어렴풋이
근원과의 만남이 있어

都把吾心看太虛 내 마음 모아잡고 태허(太虛)를 본다.


이황(李滉)의 생애



1501(연산7):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현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사(進士)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남

1502(2):부친 별세, 생모 박씨 슬하에서 큼

1512(12)(중종 1년) :숙부 송제로부터 논어를 배우기 시작.

1520(20):주역(周易) 연구에 빠져 몸을 상함

1521(21)진사 허찬의 따님과 결혼

1523(23)처음으로 성균관에 유학.한양에서 주자전서(朱子 全書)를 구해 읽고 성리학에 몰두, 장남 준 출생

1524(24)향시에 응시하여 세 번 연속 낙방

1527(27)경상도 향시에서 진사시 1등 , 생원시 2등 합격, 차남 채를 낳음,부 인 허씨 별세

1528(28)진사 회시(會試)에 2등으로 합격

1530(30)봉사(奉事)의 따님과 재혼, 아들 적을 낳음

1532(32)문과 초시(初試)에 2등으로 합격, 다시 성균관에 유학

1534(34)문과에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 시작

1537(37)어머니 박씨 사망

1542(42)어사(御史)로 충청도 강원도 검찰(檢察)

1546(46) (명종 1년)부인 권씨 사망, 귀향하여 양진암을 짓고 토계(兎溪)를 퇴계(退溪)로 고치고 아호(雅號)로 삼음

1548(48)단양군수 및 풍기 군수 역임, 백운동 서원에 사액(賜額)을 청함, 소수 서원으로 사액, 무단 기직(棄職)

1552(52)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임

1556(56)주자서절요(주자서절요) 편찬,자성록 완결, 예안 향약 초안함 1557(57)도산서당 건립 시작, 이이(李珥)와의 만남

1559(59)기대승과 4단(四端) 7정(七情) 논쟁 시작(7년간 진행)

1560(60)도산 서당 완공, 독서 및 교육에 전념

1566(66)공조 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음

1568(68)(선조 1년)성학 십도 저술하여 선조에 올림

1569(69)이조 판서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낙향함

1570(70)12월 8일 운명함



1) 이황(李滉)의 성장 배경과 경력



→이름은 황(滉),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시호는 문순공(文純公), 별칭은 동방의 주자(朱子)

<<생애>>


1501:(연산7)11월 25일(음력) 경상도 예안현(현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사(進士)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남
1502:부친 별세. 생모 박씨 슬하에서 자람
1512:숙부 송제공 우( )로부터 논어를 배우기 시작함
1520:(중종2)본격적인 학문 연구. 주역(周易)에 너무 몰두하여 건강을 크게 해침
1521:진사 허찬(許瓚)의 딸과 결혼
1523:처음으로 성균관에 유학하여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구해 읽고 성리학에 몰두. 장남 준 출생
1524: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연속 3번 낙방
1527:경상도 향시에서 진사시 1등, 생원시 2등 합격. 차남 채 출생. 부인 허씨 사망
1528:진사 회시(會試)에 2등으로 합격
1530:봉사(奉事) 권질의 딸과 재혼. 아들 적을 낳음
1532:문과 초시(文科初試)에 2등 합격. 다시 성균관에 유학
1534:문과에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 생활 시작
1537:어머니 박씨 사망
1542:충청도, 강원도 암행어사, 승문원 교감(校勘)
1546:(명종1)부인 권씨 사망. 귀향하여 양진암(養眞菴)을 짓고 토계(兎溪)를 퇴계(退溪)로 고치로 아호(雅號)로 삼음
1548:단양 군수 및 풍기 군수 역임. 백운동 서원에 사액(賜額)을 청함. 무단 기직(棄職)
1553: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임
1556:"예안 향약" 초안. "주자서 절요" 편찬. "자성록" 완결
1557:도산 서당 건립 시작. 이이(李珥)와의 만남
1559:고봉 기대승과 4단 7정(四端七情) 논쟁 시작(7년간 진행)
1560:도산 서당 완공. 독서 및 교육에 전념
1566:공조 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으나 출사(出仕) 안함
1568:(선조1)성학 십도 (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선조께 올림
1569:이조(吏曺) 판서 제수(除授) 받았으나 고사하고 낙향함
1570:12월 8일 운명함


퇴계의 눈에 비친 퇴계의 어머니



어머니 박씨는 춘천이 관향이며 타고난 자질이 아리따웠으며 아버지의 계실(繼室)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옛 것을 좋아하고 경사(經史)에 탐닉하였으나 과거 공부와 가사에는 등한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진사에 합격한 해에 나를 낳으셨으나, 내가 태어난지 7개월만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 혼자서 농사와 길쌈으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 가며, 8남매의 자녀들을 학업에 열중하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여 키우셨다.

어머니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식들을 앞에 놓고 "너희들은 아버지가 계시지 아니하므로 남의 집 아이들과는 달리 공부만 잘해도 안된다. 공부도 잘해야 하겠지만 행실을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면 애비가 없어서 교육을 옳게 받지 못해 그렇다고 남들이 손가락질을 할테니 그 점을 특별히 명심하여 조상을 욕먹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고 자애롭게 타일렀다.

뒤에 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을 때는 영광이라 기뻐하기보다는 늘상 세상의 환난을 근심하시면서 "너희들은 고관 벼슬만은 절대로 하지 말아라. 애미의 간곡한 부탁이니 꼭 명심하여라"고 당부하셨다.

어머니는 문자를 배운 적은 없으나 아버지의 정훈(庭訓)과 아들들이 강습하는 것을 들어서 가끔 깨우쳐 이해하는 바가 있었으며, 사리(事理)를 밝게 분별하는 생각과 지혜는 마치 사군자(四君子)와 같았다.

그러나 속으로만 지니고 있을 뿐 겉으로는 항상 조용하고 조심할 뿐이었다. 정유년(1537) 10월 15일에 병환으로 돌아가시니 수는 68세였다.


과거(科擧)의 종류와 절차



고려 광종 때 귀화인 쌍기의 건의로 우리 나라에 처음 시행된 과거 제도는 조선 시대에도 엄격히 실시되었다. 과거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는 소과(小科)와 최종 시험인 대과(大科)를 아울러 말한다. 그러나 보통은 과거라고 하면 대과를 칭하는데, 대과에는 문과·무과·잡과의 3종류가 있었으나 문과가 가장 중시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 사람이 대과 급제를 하자면, 먼저 생원·진사 시험인 사마시(司馬試)를 거쳐야 하는데, 이는 초시(初試)와 회시(會試, 부시) 두 단계를 통과해야 한다. 소과의 초시는 도에서 감사가 주관하고(향시, 감시) 소과의 부시는 향시에 합격한 자를 다음 해 봄에 서울에서 예조가 주관한다.

대과는 초시·회시·전시(殿試) 3단계인데, 전시는 당락에 관계없는 석차 순위 시험이다. 대과의 초시는 소과의 회시 합격자를 지역별로 각도의 감사가 주관하여 실시하고, 대과 회시는 각도에서 올라온 합격자를 서울에서 예조가 주관하여 실시한다.

이 때 문과 33인을 뽑는다. 대과의 최종 시험인 전시는 어전에서 실시하고 이때 등위를 결정한다.

이같은 국가 고시는 3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는데 이를 식년시(式年試)라 한다. 그밖에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임시로 보는 경과(慶科)가 있었다.


*이황의 인품을 알고, 이를 본받기 위한 자세를 가진다.


이황의 일화



이황이 32세 때 서울에서 과거를 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일이다. 길가 마을 집에서 묶었는데, 한 밤중에 그 집에 도둑이 들었다.

"가진 물건을 모두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 버릴 테다.!" 두둑의 우두머리인 듯한 사나이가 칼을 빼 들고 호통을 쳤다. 같이 묵던 일행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으나, 퇴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다른 놈들은 우리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데, 이 약골로 생긴 놈만은 그런 빛이 없으니 넌 우리가 무섭지 않느냐?"고 두둑의 우두머리가 퇴계에게 물었다.

"나에게 잘못이 없는데 어찌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겠나." 퇴계는 태연히 대답하였다.
"뭐라고, 가만 보니 이 놈은 보통 놈이 아닌걸. 그렇지,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칼을 쥐고 있는데도 무섭지 않는가?"

"내 본디 가진 것이 없고, 또 그대들과 원수진 바가 없으니, 나를 해치기야 하겠나!" 보아하니 그대들도 부모와 처자가 있는 몸인 듯한데, 부모에게 효도는 못할망정 마음 아프게 해 드려서야 되겠는가. 사내 대장부가 뭘 못해 나그네의 보따리나 털고 다닌단 말인가!"
"누군 이 짓을 하고 싶어하는 줄 아시오. 벼슬아치들 등살에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이 짓이 아니오."

"그럼 벼슬아치들 것이나 뺏지 어째서 죄 없는 백성들의 것을 빼앗으러 드오. 그리하면 그 못된 벼슬아치들과 무엇이 다르오."

서슬이 시퍼래서 칼을 휘두르며 호통을 치던 도둑들은 퇴계의 조리 있는 말에 그만 기가 꺾이고 어름어름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나 버렸다.

퇴계(退溪)는 왜 그토록 벼슬을 멀리하려 했을까?

몸에 병이 나도록 공부하여 과거 시험을 볼 때는 높은 자리에 앉아 권력과 금력을 한 손에 쥐고, 허세를 부리려는 것이 현실인데, 퇴계는 어찌하여79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20번이 넘게 사직서를 썼으며, 남들이 근무하기 싫어하는 외직을 원하고, 높은 자리는 마다했을까?

퇴계는 폭군 연산군 시대에 태어나 임진왜란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대외적으로는 남북의 두 오랑캐가 끊임없이 밀려 닥쳤고, 조정에서는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신구 세력간의 알력으로 쥐새끼 같은 간악한 무리들이 서로 죽이고 헐뜯고, 국권을 갉아먹는 당쟁 사화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막힌 시대에 퇴계는 살았다.

퇴계가 태어나기 3년 전에는 무오사화가 일어나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무덤이 파헤쳐 졌으며, 퇴계가 4세 되던 해에는 갑자사화로 김굉필이 능지처참되었다. 중종의 총애를 받으며 도덕 정치를 표방하고 개혁을 시도했던 조광조가 기묘사화라는 미친 바람에 독배를 마셨을 때 퇴계의 나이는 19세 였으며, 퇴계가 45세 때 을사사화가 벌어졌을 때는 퇴계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고, 그의 형은 곤장을 맞았던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이 모순과 갈등의 회오리바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직접 조정에 뛰어들어 간신들의 목을 자르거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사욕의 불길을 꺼 주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퇴계는 칼을 들고 간신들의 목을 자를 수 있는 쾌남아가 아니었다.

그는 문사요 붓을 들고 시를 짓는 여성적인 인간이었다. 자신의 호를 퇴계라고 지은 것도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뒤로 물러서기를 좋아하는 자신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가 국가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학문을 통해 진리를 밝히고, 그 진리의 맑은 샘물을 통해 사람들의 더러운 욕심을 씻어 주는 길뿐이었다.


퇴계와 율곡의 만남



율곡의 초면 인사
溪分洙泗派 시냇물은 수사(洙泗)에서 한 갈래 나눠 왔고
峯秀武夷山 드높은 봉우리는 무이(武夷)처럼 드높도다.
恬計經千卷 그 고요한 삶은 경서 천 권이요
行藏屋數閒 고요한 뒷방이 한가하기만 하도다.
襟懷開霽月 열린 마음은 개인 하늘의 달이옵고
談笑止狂簡 웃으며 하시는 이야기에는 물결조차 잠잠하오.
小子求問道 소자가 뵈옵는 일은 도를 구하고자 함이니
非偸半日閑 반나절 헛되이 보냈다 생각지 마옵소서


퇴계의 화답 인사



病我牢關不見春 내 병들어 문 닫은 채 봄빛을 못 보더니
公來披豁醒心神 그대 만나 얘기를 나누니 심신이 상쾌하다.
已知名下無虛士 선비의 높은 이름 헛되지 않음을 알았으니
堪愧年前闕敬身 지난날 사귀지 못했음이 적이 부끄럽소
嘉穀莫容 熟美 아름다운 곡식에 가라지 자라지 말게 하고
纖塵猶害鏡磨新 새로 닦은 거울에는 티끌도 해가 되오
過情詩語須刪去 부질없는 이야기는 모두 제쳐 두고
努力工夫各日親 힘써 공부하여 날로 더욱 친해 보세
持心貴在不欺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入朝當戒喜事 벼슬자리에 올라서는
일을 좋아하기를 경계하라


2)이황의 학문적 업적과 사상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정열을 바침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일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음
*이론적 진리에 그치지 않고 진리의 생활화
강조→지행 일치(知行一致)의 주장과 실천
*이황의 인생관과 학문적 입장의 절정→경(敬)
*일본 메이지 시대 교육 이념의 기본 형성에 영향을 끼침
3)이황의 삶과 사상에서 내가 배운 교훈


이황과 기대승의 4단 7정 논쟁



퇴계가 서울에 살던 53세 때 옆집에 추만(秋만) 정지운(鄭之雲)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정지운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 자기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던 학자였다. 그런데 정지운은 동생을 가르치기 위해 하늘과 인간이 도덕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그림으로 그려보고는, 옆집 사는 이황에게 틀린 곳이 없는지 보아 달라고 했다.

이 그림이 천명도(天命圖)였으며, 이황은 그 천명도를 보고 나서 그 가운데 한 부분을 고쳐 주었는데, 그 부분이 4단을 이(理)와 연결짓고 7정을 기(氣)와 연관 지은 부분이었다. 정지운의 그림에는 "4단은 이에서 생겨나고 7정은 기에서 생겨난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는데, 이황은 이 부분을 "4단은 이가 드러난 것이고 7정은 기가 드러난 것"이라고 고쳐 주었다.

본래 이는 만물의 법칙이고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재료이다. 이것을 사람에 적용하면 사람의 이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이유 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실천 법칙을 뜻한다.

그리고 기는 구체적인 살과 피, 손짓하나 발짓 하나부터 마음이나 정신 상태까지의 모든 움직임을 이루는 바탕이다. 그 가운데 이는 절대적인 법칙이기 때문에 항상 선하겠지만, 기는 몸짓이나 행동이 법도에 맞기도 하고 안 맞기도 한 것처럼 악이 나올 수도 있는 근거이다.

그런데 이황은 정지운의 천명도를 고쳐 주고 나서 얼마 안가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갔는데, 이 그림은 많은 학자들의 논란을 일으켰고, 6년이 지난 뒤 기대승이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오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황의 주장은 4단은 그 결과가 좋은 것이기 때문에 이에서 나오고 7정은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기 때문에 기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대승은 크게 3가지 입장에서 반대 의견을 펼친다.

첫째는 세상 모든 것들 속에는 언제나 이와 기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에 마음의 움
직임인 4단과 7정도 하나는 이에서 나오고 하나는 기에서 나온다는 식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4단도 감정이고 7정도 감정이기 때문에 7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뽑아 내면 4단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4단을 7정 가운데 포함시켜야 한다고 했다. 셋째는 기는 현실 모든 변화의 근거이기 때문에 감정의 움직임이 기의 움직임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4단을 가리켜 움직일 수 없는 이가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대승의 반박에 이황은 한 발 물러서서 4단은 이가 먼저 움직이면 기가 따르는 것이고(理發氣隨), 7정은 기가 움직이면 그 위에 이가 함께 타서(氣發理乘) 드러나는 것이라고 수정했다. 이렇게 고친 것은 이와 기가 언제나 같이 있는 것이라는 기대승의 반박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황은 4단과 7정이 모두 정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 결과가 4단은 항상 선으로 귀결되고 7정은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 두 가지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를 본다면 서로 가리키는 바가 다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기가 언제나 같이 있기는 하지만 역시 가리키는 바가 다르다는 입장에서는 그 출발이 무엇이었는가에 따라 나눌 수 있다는 입장을 버리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이와 기가 떨어질 수 없다고 해서 4단에 기를 섞어 말한다면 4단도 선만 있을 수 없게 되다고 하였다.

인간의 본성을 그 본래 타고난 순수한 모습과 욕심에 얽매인 모습으로 나눌 수 있듯이 인간의 감정도 4단과 7정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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