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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귀신붙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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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류충현약용버섯 작성일05-12-12 12:11 조회2,1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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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베어 내지 못하는 것은-

[ 風水說의 信奉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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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 댐 進入路 臨淸閣앞 道路 가운데 한그루의 늙은 檜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로 因하여 수많은 交通의 障碍가 있음에도 어느 누구도 除去하지
못하는 理由는 風水說의 信奉 때문인것 같다.

그 옛날 安東府內 에는 靑年들이 夭壽하여 水系를 바꾸고 큰 나무를 심어
水 와 木의
本性을 發揮케 하므로써 夭節을 막았다는 防殺木이 읍내 곳곳에 아직도
여러개가 남아있으니 안동 시장이 정월 보름에 고사를 지내는 소위 부신목이
그것이고 또 이나무도 그러한 맥락을 같이한 것 같다.

부신목 상고



서낭신 즉 성황당의 기원은 중국 고대(古代) 성지(聖地) 신(神)에서 유래되어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에 유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무에 고사(告祀)하는 것은 성황당(城隍堂) 제의(祭儀)의 일종(一種)으로 볼 수 있는 바
성황당은 그 고을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제사토록 했다는 이조실록을 상고(上考)할 때
우리 나라는 조선조(朝鮮朝) 초기부터일 것이다.

안동의 부신목은 기록(記錄) 문헌(文獻)이 없어 시작(始作)연대는 미상(未詳)이나 조선
세종때 고불(古佛)[孟思誠]의 예언(豫言)에 따라 흐르는 물길을 바꾸고 큰나무를 심어
거목을 섬기는 데서부터로 추정(推定)할수 있다.

당시 안동 부 성내에는 젊은 청년들이 요수(夭壽)하여 과부(寡婦)가 득실거렸는데 그
까닭은 잘못된 지명(地名) 때문이란 것이다. 한때 안동의 지명을 영가(永嘉)라 불렀던
적이 있었다. 영가(永嘉)란 뜻은 길영(永)자는 두 이(二)아래에 물수(水)한 자로 곧 두
물이 아름다운 곳이란 말이다.

그 두 물줄기는 안동댐 본류인 물야탄이 견항(犬項) 즉 개목다리 밑을 거치고 임하댐쪽
반변천(半邊川) 물이 흘러 귀래정(歸來亭) 앞에서 합수(合水)되어 낙동강(洛東江)을
이루고 남으로 흘러간다.

이의 수계(水系)는 마치 사람인(人)자가 거꾸로 된 형국이다. 그래서 영가(永嘉)에는
젊은 청년들이 조서(早逝)한다는 이야기다.

액(厄)을 방지(防止)하려면 수계(水系)를 바꾸어 사람 인(人)자를 어질인(仁)자로 고치면
된다는 맹사성의 예언을 따라 영남산(映南山)에서 흐르는 개울 천리천과 서당골에서
흘러내리는 당북천을 낙동강으로 바로 끌어넣어 수계를 어질 인(仁)자로 바꾸고 성내
곳곳에다 큰나무를 목숨 수(壽)자형으로 심어 거목을 숭앙(崇仰)하였던 결과 수(水)와
목(木)은 본성을 발휘하여 요수(夭壽)가 방지되었다고 한다.

이런 염승(厭勝)의 방살목(放殺木)이 아직도 시내 여기 저기 남아 있으니 군수 관사
느티나무가 그것이고 안동댐 진입로 임청각 앞 도로중앙에 서있는 회나무가 그것일 것이다.

까닭에 관사(官舍)의 느티나무는 부신목으로 신앙시 되어 고사(告祀)를 올리고, 임청각
(臨淸閣) 앞 회나무는 교통(交通)의 장해(障害)가 그토록 극심(極甚)한데도 어느 누구도
베어내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그대로 놓아둔채 무당들이 가끔씩 이 나무에 굿을 한다.



科學文明이 高度로 發達한 現代에 사는 우리가 아직도 그 迷信같은 風水說을
버리지못함은 무슨 까닭일가 ?. 아마도 그것은 地力[땅에서흐르는氣]에
依存하여 人間生活의 吉凶禍福을 占치려 했던 風水說의 運命的인 信仰이
오늘까지 뿌리깊게 남아 있 다는 뚜렸한 證據이다.

그래서 地理[땅의이치]에서 生活과 運命을 良好하게 하려는 風水信仰의
脫皮는 아직까지 時期尙早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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