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충현약용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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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역사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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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류충현약용버섯 작성일05-12-12 12:08 조회1,2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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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文化의 槪況



1. 恩惠 받은 땅 安東



가. 안동의 형승(形勝)


도의 빼어난 경치는 다른 도에 비해 1, 2위를 다투고 안동부는 도에서 가장 큰 고을로 역시 살기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이석형, [사청기]).

道之形勝 視他道最焉 而府於道之雄藩 亦不居甲乙之下矣

무협이 왼쪽에 성산이 오른쪽에 버티고 있으며 큰강은 옷의 띄처럼 둘렀고 물은 돌아 호수가 되는데 지류의 근원은 머리를 간방(艮方)에 두고 꼬리는 곤방(坤方)에 둔 것은 마치 하늘의 은하수(銀河水)와 같다. 그래서 복주는 문사와 걸인들이 왕왕 이 정기(精氣)를 타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다(백문보, [영호루금방기]).

巫峽列其左 城山控其右 大江襟帶 匯而爲湖 凡水之源派 首艮而尾 坤者 在天謂之河漢 故福州之文士傑人 往往稟是氣而生其間(白文寶, [映湖樓金榜記])

이름난 성씨와 큰 문중들이 중외에 빛나게 드날렸으니 그 지위는 장수와 재상에 이른 사람이 끊어지질 않았다. 그러므로 인물과 토산품에 있어서는 다른 고을들은 여기에 비교할 바가 못된다(김수온, [관풍루기]).

府之著姓大族 蜚英中外位至 將相者 代不乏人則 其人物土産 又非他邑之可比(金守溫, 觀風樓記])

읍의 자리는 산과 강의 모양이 제일 좋은 곳을 취했고 인물은 장상가 들이 수두룩하다(정몽주, [영호루기]).

邑居最得山川勢 人物紛然將相家(鄭夢周, [映湖樓記])

이중환은 강가에 살기 좋은 곳은 평양(平壤)이요, 계승(溪勝)의 제일은 안동에 도산(陶山)과 하회(河回)라 하였다([택리지]).


江居第一平壤 溪勝第一安東陶山 河回([擇里志])


▣ 안동팔경 (安東八景)



第 1 景 [仙漁暮帆] 仙魚臺下 銀魚肥
선어대 아래서 은어가 살찌고
第 2 景 [歸來暮雲] 歸來亭上 白雲遊
귀래정 위에는 흰구름 노니누나
第 3 景 [西岳晩鍾] 西岳寺樓 前日樂
서악사루에 어제도 즐겁더니
第 4 景 [臨淸古塔] 臨淸閣軒 古詩愁
임청각 마루의 옛 시가 그립다
第 5 景 [鶴駕歸雲] 鶴駕山影 照三郡
학가산 그늘은 세 고을에 드리우고
第 6 景 [燕尾細雨] 燕尾院名 千萬秋
제비원 이름은 만세에 이어지며
第 7 景 [河回淸風] 西厓祠前 松竹綠
병산서원 솔과 대나무가 푸른데
第 8 景 [陶山明月] 退溪門下 洛江流
도산서원 아래는 낙동강이 흐른다

나. 안동부의 형국(形局)

안동의 읍기는 행주형(行舟形)이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읍기(邑基)는 행주형(行舟形)이 최고라 했다. 이는 곧 배가 물건을 가득 싣고 떠나려 하는 형국이므로 인재(人才)가 많고 재산(財産)도 늘어난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 나라에 행주형국은 모두 다섯 군데가 있는데 안동(安東), 평양(平壤), 공주(公州), 무주(茂朱), 청주(淸州)를 말한다.

다. 안동 사람의 마음씨


부지런한 것과 검소(儉素)한 것을 숭상(崇尙)하며 농잠(農蠶)에 힘쓰고 풍속(風俗)은 옛적 성인(聖人)들이 살던 때처럼 예스러우며 심성(心性)이 순박(淳朴)하여 인품(人品)은 둥글고 잔잔하다.

尙勤儉務農桑 務本節用 俗尙勤儉 俗古民淳 風氣渾淪

윤리와 의리에 밝고 도학을 중하게 여기며 비록 외따고 작은 마을일지라도 가는 곳마다 글읽는 소리가 자자하고 비록 못 살아 헤진 옷을 입고 항아리 창을 단 집에 살더라도 역시 도덕(道德)과 성명(性命)을 논한다.

明倫理重道學 雖孤村殘里 軌有讀書聲 襤衣瓮窓 亦皆談道德性命矣

선비정신이 충만하여 남을 위해 희생마저도 감수하면서 순하고 어질게 살아가는 양반으로 효제(孝悌), 충서(忠恕), 신의(信義)란 유학(儒學)을 중시하며 <述而不作> 하고 <信而好古> 하나니 즉, 지어서 말하지 아니하고 서로가 믿으며 옛것을 좋아한다.

우리의 속담(俗談)에 <양반은 ①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친다. ② 아무리 추워도 잿불은 안 쬔다. ③ 대추하나로 요기(療飢)한다. ④ 그 사람 캄캄한 밤에 만져봐도 양반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그렇다. 양반은 당당하며 비굴하지 않고 아무리 위급해도 당황하지 아니하며 체통을 지킬 줄 알고 물욕이 없으며 어려서도 그 모습에서 장래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자가 양반이니 그들이 바로 안동사람인 것이다.

※참고[註]
안동의 읍거지(邑居地)는 전국 굴지(屈指)의 명당인 행주형(行舟形)으로 조상(祖上)이 물려준 은혜(恩惠)받은 땅이다.
옛부터 도(道)의 웅번(雄藩)으로 살기 좋기로 으뜸이며 무협(巫峽)이 좌청룡(左靑龍), 성산(城山)은 우백호(右白虎)인데 영남산(映南山)을 주산(主山)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하고 낙동강은 금대(襟帶)처럼 둘러 마치 은하수(銀河水)같아 그 사이에서 자고(自古)로 문사(文士)와 걸인(傑人)들은 수없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2. 忠節의 故庄



가. 고장(故庄)의 옛 이름



안동은 그 옛날(BC 57) 염상도사(念尙道士)가 처음 창녕국(昌寧國)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전설(傳說) 뿐이고 기록(記錄)상으로는 고신라(古新羅)의 고타야군(古抒耶郡)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고창(古昌)으로 이름을 고치면서 무려 17번이나 읍호(邑號)가 바뀌었다.
이는 창녕국(昌寧國)과 고창군(古昌郡)에서 일계(一界), 지평(地平), 화산(花山), 고령(古寧), 고장(古藏), 석릉(石陵), 능라(綾羅), 안동(安東), 영가(永嘉), 길주吉), 복주(福州), 안동부(安東府)가 곧 그 이름들이다.


나. 왜 안동(安東)인가



안동이란 말은 대동의 안전을 보장한 곳이란 뜻이다. 즉 <安於大東> 고요한 동방 아침의 나라 대동(大東) 즉, 고려(高麗)를 안전(安全)하게 한 고을>이란 뜻에서 안동(安東)으로 지명(地名)을 쓴 것이다.

1) 처음 안동(安東)


<고려 태조[王建]가 고창(古昌)을 안동(安東)으로>세 장수(將帥)[金宣平·權幸·張貞弼]가 이 고을 땅 병산(甁山)에서 후백제의 임금 견훤(甄萱)을 물리침으로 고려(高麗)는 후삼국(後三國)을 통일(統一)하는데 결정적(決定的)인 계기(契機)가 되었다.
이에 고려태조(高麗太祖)는 이들 세 장수를 태사(太師)로 봉하고 김, 권, 장으로 사성(賜姓)함과 동시에 고을의 이름을 안동이라 개칭(改稱)하였다.[병산 대첩에 대하여는 안동의 전설편에 볼 것]

◈ 병산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월사 덜사 흥겹게 놀았던 것이 오늘날 차전[동채싸움]이란 민속(民俗)놀이가 되었다.

2) 두 번째 안동(安東)


<공민왕(恭愍王)이 복주(福州)를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은 홍건적(紅巾賊)의 침입(侵入)으로 나라가 위태롭고 서울인 개성까지 위협을 받자 나라안의 수많은 고을들을 제쳐두고 우리 고장(故庄)으로 몽진(蒙塵)했던 것이다. 그 이
유는 안동은 예로부터 충의향(忠義鄕)으로 충신(忠臣)과 열사(烈士)들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 [重要人物]

1) 고려 충열 김방경(金方慶) : 왜구를 막고 삼별초 난을 평정함.
2) 정평공 손홍량(孫洪亮) : 홍건적 격퇴 계책(計策) 진언(進言) 유공.
3) 송안군 이자수(李子脩) : - 〃 -
4) 주민들은 충절로 임금을 공궤(供饋)하고 부녀자 들은 공민왕의 왕후(王侯)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모셨다.

◈ 부녀자들이 등을 연하여 노국공주가 건너도록 한데서 유래한 < 놋다리 밟기>는 오늘날 부녀자의 민속놀이가 되었다.


다. 국난극복(國難克服)의 선봉(先鋒)



1) 임진왜란(壬辰倭亂)


서애 류성룡:영의정(領議政)으로 입상(入相) 출장(出將) 국난극복, 구국(救國). 학봉 김성일:초유사(招諭使)로 백의종군 의병(義兵) 봉기(蜂起). 근시재 김 해:안동지역 의병(義兵)대장 계림(鷄林)서 전사(戰死). 기봉 류복기:안동의병 정제장(整濟將)으로 팔공산에서 회맹(會盟). 곽재우와 함께 의병(義兵) 활동. 기타 의병:안동중심 유림(儒林)이 봉기(蜂起)하여 의병(義兵) 활약(活躍).2) 경술국치(庚戌國恥)

가) 독립투사(獨立鬪士)의 맹활약(猛活躍)

한일합방(韓日合邦) 이후 일제(日帝)에 항거(抗拒)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앞장섰던 분들은 부지기수(不知其數)이나 그 대표적(代表的)인 몇 사람만 적는다.
석주(石洲) 이상용(李相龍),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추강(秋崗) 김지섭(金祉),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하구(何求) 김시헌(金始顯),
단주(旦洲) 류림(柳林).나) 3.1운동(運動) 예안의 만세(萬世) 시위(示威):1919년 음력 3월 19일 예안 장날을 기해 조수인, 이동봉, 이운하, 이원혁, 이원영, 이열호 등이 수천 군중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하였다.

임동 챗거리 의거:서울에서 독립(獨立) 선언문(宣言文)을 가지고 온 류동태, 이균호와 더불어 3월 20일 임동 장날을 기해 수천 군중이 운집(雲集)한 자리에서 류연성, 류동수, 류교희 등이 앞장서서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낭독(朗讀)하고 만세(萬世)를 부르면서 시위운동(示威運動)을 벌리고 일본 놈의 관청(官廳)을 부수며 왜경(倭警)을 몰아내는 투쟁(鬪爭)을 했다.

임하의 만세운동(萬世運動):금소동에 살던 임찬일은 동리 금양(錦陽)에서 수학(修學)중 상경하여 지하(地下)운동(運動)을 전개(展開)하다가 독립선언문을 입수(入手)하고 귀향(歸鄕), 김원진과 거사(擧事)를 합의(合議)하여 노말수, 임동숙, 임윤익, 손응돌, 류북실, 임춘섭, 임범섭 등과 합세(合勢) 3월 20일 금소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했다.

길안의 만세운동:1919년 3월 1일 오후 5시 길안 천지 장터에서 손영학, 김정연, 김정익 등이 독립선언문을 낭독(朗讀)하고 만세를 외치면서 면사무소(面事務所)의 유리창을 부수고 길안 주재소(駐在所)를 기습(奇襲)하였다.

※ 참고[註]
그 후 광복(光復)이 된 오늘에 이들 주동자(主動者)들은 모두 건국포장(建國褒章)이 추서(追敍)되었고 1981년 8월 15일을 기해 그들의 비장(悲壯)한 공적을 새겨 천추(千秋)에 길이 전하고자 안동댐 부근 언덕에 기념비(記念碑)를 세워 두고 있다.


3) 安東農高 學生들의 抗日義擧

안동농림고등학교 8, 9, 10회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교유로 류시승이 가담(加擔)했고 기독교인(基督敎人)에 김광현, 백태성, 이주현, 정현모, 강일원 등이 제휴(提携)했다.
대한독립회복연구단(大韓獨立回復硏究團)이란 명칭(名稱) 아래 구국일념(救國一念)으로 일본(日本) 기관(機關)을 파괴(破壞)하고 후방(後方)을 교란(攪亂)하여 일본군의 사기(士氣)를 꺾고 연합군(聯合軍)이 상륙(上陸)하는데 유리토록 해 줌으로써 국권(國權)을 회복(回復)하려고 했다.
의분(義奮)의 스승과 학생들은 민족(民族)의 횃불이 되었고 옥고(獄苦)를 치룬 50명중 손성한(孫聖漢)은 약관(弱冠)으로 순국(殉國)하여 기념비(記念碑)를 농고에 세웠다.

※ 참고[註]
이처럼 나라가 위태(危殆)로울 때마다 그 선봉(先鋒)에 섰으니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는 삼태사(三太師)의 병산대첩(甁山大捷)의 승리(勝利)가 그것이다.
공민왕(恭愍王) 때는 복주(福州) 고을로 몽진(蒙塵)한 왕을 도와 정성(精誠)어린 충성(忠誠)으로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치고 왕이 환도(還都)하는데 유공(有功)했다.
임난(壬亂) 때는 안동출신 서애(西厓)가 영의정(領議政)으로 입상출장(入相出將)해 가면서 누란(累卵)의 위기(危機)를 극복(克服)했고 유림(儒林)들은 의병(義兵)을 일으켜 나라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일제(日帝) 치하(治下)에서는 많은 유학자(儒學者)들이 의거(義擧),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였고 지역민들은 기미(己未) 독립만세 운동에 앞장섰으니 안동은 한마디로 국난극복(國難克服)의 주역(主役)들이 사는 충절(忠節)의 고장(故庄)이다.



3. 儒敎文化의 中興地 鄒魯之鄕



가. 시대별 人物


東國人物半在嶺南, 嶺南人物半在安東 동국인물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물의 반은 안동에 있다.

1) 고려조:김방경(金方慶), 권부(權溥), 우탁(禹倬), 왕후(王煦), 김구용(金九容), 이자수(李子脩), 손홍량(孫洪亮).2) 조선 창업:김사형(金士衡), 권근(權近), 김자수(金自粹), 류빈(柳濱), 심귀령(沈龜齡), 배상지(裵尙志), 이천(李 ), 김철(金鐵).

3) 조선 초기:김돈(金墩),권람(權擥), 하위지(河緯地), 류의손(柳義孫), 권채(權埰).

4) 사림성장기:류숭조(柳崇祖), 권주(權柱), 이종준(李宗準), 권민수(權敏手), 권경유(權景裕), 권달수(權達手), 이굉(李 ), 이명(李 ), 이주(李胄), 김계행(金係行), 김수동(金壽童), 이우(李 ), 이현보(李賢輔), 김영철(金永鐵).

5) 중종 반정 후:권벌(權 ), 이해(李瀣), 권예(權 ).

6) 성리학 발달기:이황(李滉), 구봉령(具鳳齡), 김부필(金富弼), 김언기(金彦璣), 권호문(權好文), 조목(趙穆), 배삼익(裵三益).

7) 임란과 안동인:류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김해(金垓), 배용길(裵龍吉), 이홍인(李洪仁), 이정박(李庭栢). 류복기(柳復起).

나. 退溪를 中心한 學者들 國家에 貢獻


퇴계(退溪)는 공자(孔子)가 창시(創始)한 유교철학(儒敎哲學)을 실천적(實踐的)인 학문(學問)으로 발전(發展)시킨 대가(大家)로서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集大成)한 성현(聖賢)이다.
<정조(正祖)는 사문수간(師門手簡)을 보시고 퇴계(退溪)를 일러 성현(聖賢) 이라 하였다.>

[原文] 聖人爲天口 賢人爲聖譯 乎謂於此則 非吾所爲道也

퇴계(退溪)는 수많은 제자(弟子)를 길러 국가의 양재(良才)를 배출(輩出)하였으니 실로 조선중기(朝鮮中期) 학자(學者)들은 퇴계의 가르침에 영향(影響)을 받지 않은 이가 없다.
율곡(栗谷)이 그렇고 송강(松江) 정철(鄭徹), 우계(牛溪) 성혼(成渾), 중봉(重峰) 조헌(趙憲) 등 모두가 퇴계의 사상적(思想的) 영향(影響)이니 그로 인해 우리 나라 사상(思想)의 주류(主流)였던 유교(儒敎)의 중흥(中興)을 이룩한 곳이 바로 안동이다.
여기 한 가지 더 첨가(添加)할 것은 <花山風雨五龍飛>이다. 영조(英祖) 13년(1735) 증광문과시(增廣文科試)에 안동(安東)에서 한꺼번에 나란히 다섯 사람이 급제(及第)하자 영조(英祖)는 기뻐하며 축시(祝詩)를 내리고 <花山風雨 五龍飛>라 하였다.

▣ 英祖의 祝詩

花山風雨 五龍飛 화산의 비바람에 다섯 마리 용이 날았으니
絶代佳人 世瑞稀 절대가인으로 세간상서에 드문 일이로다
春回二柳 交仙李 봄되어 두버들이 오얏과 신선같이 노는데
加重雙金 動紫 쌍금이 가중되었으니 자위를 움직였도다.

오룡(五龍)이란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학음(鶴陰) 김경필(金景泌)이다. 이분들은 영남학맥(嶺南學脈)을 이어받은 대유학자(大儒學者)로써 그들의 업적은 오늘까지도 혁혁(赫赫)하게 남아 있다.

※ 참고[註]
이와 같이 안동에는 고려(高麗)에서부터 조선조(朝鮮朝)에 이르기까지 많은 명현(名賢) 석학(碩學)들이 배출되어 동국(東國) 인물(人物) 반(半)은 영남(嶺南)에 있고 영남(嶺南)인물(人物) 반(半)은 안동에서 태어났다.
특히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유교(儒敎)철학(哲學)의 이념(理念)인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集大成)하여 유교문화(儒敎文化)를 중흥(中興)시켰으니 뛰어난 인물(人物)들 모두가 퇴계의 제자(弟子)로써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태어난 고장(古庄)과 같이 유서(由緖)깊은 곳이기에 안동을 일러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부른다.


4. 文化財의 寶庫, 私學의 淵叢



가. 안동 文化財의 特徵


다른 지방(地方)의 문화재 즉, 경주(慶州)는 신라(新羅), 부여(扶餘)는 백제(百濟), 서울은 조선(朝鮮). 이와 같이 각각 당대의 것만 보유(保有)되고 있는데 반(反)하여 우리 안동의 문화재는 멀리 선사(先史)로부터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는 각종 유적(遺蹟)들이 골고루 보존(保存)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特徵)이다.

나. 文化財 現況


國寶 제15호(鳳停寺 極樂殿) : 木造建物 중 國內 最古
國寶 제121호(하회탈, 병산탈) : 木造탈 중 國內 最古
國寶 제132호(懲毖錄) : 壬亂을 前後한 國政日記
國寶 제16호(新世洞7層塼塔) : 最古의 벽돌 塔

[國內에서 塼塔이 가장 많이 分布된 地方은 안동이다.]

다. 院宇 現況


향교(鄕校)는 고려(高麗) 이래 공립학교(公立學校)이며 서원(書院)은 사립학교(私立學校)이다.

전국에서 서원(書院)이 가장 많았다는 것은 당대(當代) 교육(敎育)의 향(鄕)으로 후학(後學)을 길러 국가(國家)에 공헌(貢獻)할 양재(良才)를 배출(輩出)한 증거(證據)이다.

※ 참고[註]
안동에는 먼 선사(先史)로부터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多樣)하고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여 학계(學界)는 안동을 일러 문화재의 보고(寶庫)라고 말하며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부단(不斷)하게 찾아들고 있다.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역시 목조가면(木造假面)으로 가장 오랜 고려 때의 하회탈, 병산탈은 국보 제121호로 조각솜씨가 뛰어나 세계적(世界的)인 걸작(傑作)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懲毖錄)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이 쓴 임난(壬亂)을 전후(前後)한 국정(國政)을 소상(昭詳)하게 기록(記錄)하여 단절(斷切)된 부분의 임난사(壬亂史)를 이해(理解)하는데 귀중한 책이다.
또 안동은 전탑(塼塔)이 가장 많이 보유(保有)된 지역으로 국보 제16호인 신세동7층전탑을 비롯 모두 6개가 남아 있다. 불교(佛敎)의식(儀式)에서 전탑을 세우는 뜻은 무엇이며 왜 안동에만 전탑이 운집(雲集) 되었는가 하는 것이 연구(硏究)의 과제(課題)라 하겠다.
더욱이 이천동 석불(제비원 미륵)은 보물 제115호로 성주(城主)의 본향(本鄕)이 안동임을 말해주는 듯 자비(慈悲)로운 미소(微笑)를 머금고 있다.
그리고 많은 인재(人才)를 길러낸 사학(私學)의 전당(殿堂)인 서원(書院)도 전국에서 제일 많아 옛부터 교육(敎育)의 열이 대단했던 고을이다. 그래서 안동은 문화재(文化財)의 보고(寶庫)요 교육(敎育)의 도시(都市), 인다(人多)의 고장(故庄)으로 알려져 있다.


5. 안동의 三多와 三無



가. 삼다(三多)

1) 산다(山多) 2) 인다(人多) 3) 원다(院多)

나. 삼무(三無)

1) 만석거부(萬石巨富) 2) 송덕비(頌德碑) 3) 향리(鄕吏) 성내거주자(城內居住者)


[안동의 삼다삼무는 별도로 기록 하였다 : 목록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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