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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명소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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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1-12-02 17:22 조회1,5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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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명소 안내]

- 가볼만한곳 모두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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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명소



안동 명소
▣고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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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으로 둘러진 암산을 마주보며 질서정연히 자리잡은 서원이다. 고산서
원은 퇴계선생의 도학 적전인 대산 이상경(1711~1781) 선생과 아우인 소산
이광정(1714~1789) 선생을 제향하기 위하여 지어졌다.

대산선생은 25세에 문관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참의에 제수되었
으나 사퇴하고 퇴계 선생의 학통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연구하는 한편,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문인록에 등재된 제자만도 273인이나 된다.

고종 19년(1882)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순종 4년(1910)에 문경공이란 시호
가 내려졌다. 문집 27책이 있고, \\'이기휘편\\', \\'제양록\\', \\'퇴계서절요\\', \\'사례상
변통고\\', \\'병명발휘\\'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경내에는 경행사, 호인당, 앙지재, 백승각등 9동의 건물이 있는데 경행사는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강당인 호인당은 정면 5간, 측면 2
간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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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선생은 연산군 7년(1501)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출생
하여 선조 3년(1570) 에 돌아가셨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을 추증되었다.

70여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연구,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이 나라 교육 및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었고 만대의 정신적 사표가 되셨다.

선생은 명종 16년(1561) 에 도산서원을 세웠고 사후 4년만인 선조 7년
(1574)에 문인과 유림이 서원을 세웠으며 선조임금은 한석봉 친필인 도산서
원의 현판을 사액하셨다.

1970년 정부에서는 서원을 보수 정화하여 성역화 하였다. 주요 저서로 계몽
전의, 성학십도, 도산십이곡, 주자서절요, 심경후론, 활인심방, 예안향약, 자
성록 등이 있다.

▣도산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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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혜의 옛 지명은 온계리였으며, 온혜로 바뀐 것은 최근의 일이다. 온계리라
고 불리게 된 이유는 이 마을에 온천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옛날에는 수질이 매우 좋은 온천수가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소문을 들은 나환자들이 많이 모여들자 도산의 유림들이 온천을 흔적도
없이 묻어 버렸다고 한다

온천수특징 : 지하 580m에서 토출되는 약알칼리성에 중탄산나트륨천이 함유
된 PH 9.26의 양질수로 수온은 25.3(도), 일일채수량은 4,600톤,그 효용으로
는 모세혈관 확장, 혈압강화, 심장부담 감소 및 피부를 매끄럽고 부드럽게
하는 온천수이다.(안동⇒와룡⇒도산서부⇒도산서원)
▣동부동 5층 벽돌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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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의 모습으로 보아 목탑의 영향을 받고 있다. 안동지역의 대표적인 벽돌
로 만든 탑이다.

안동역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탑 부근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점으로 미
루어 이곳이 사찰지임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후세의 보수로 인해 기단부는
원형을 잃었는데 지금은 높이 42cm의 긴 화강암대석 3단이 놓여 있다. 탑신
에는 층마다 감실을 설치했다. \\'영가지\\'를 통해서 이 탑 역시 법흥사탑과 같
이 7층이었고 금동으로 만든 상륜부가 있었으나, 선조 31년(1598) 임진왜란
직후 명나라 군인들이 약탈해 갔음을 알 수 있다. 6.25전란 때 일부 파괴된
것을 1962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통일신라시대의 벽돌탑으로 높이
8.35m, 기단폭 3.65m이다.

▣묵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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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길안.포항방면으로 약 30분을 달리면 왼편에 묵계서원 안내를 볼
수 있다. 묵계리 구 고갯길을 따라 100m쯤 가면 왼쪽에 서원이 자리잡고 있
다. 이 건물은 보백당 김계행(1431~1517) 선생과 응계 옥고(1382~1436)선생
을 봉향하는 서원으로 숙종 13년(1687) 에 창건되었다. 보백당 선생은 조선
초기 성종때 대사성을 역임, 이조판서 양관대제학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
헌공이다.

묵계리에서 \\'묵계새마을교\\' 를 건너 하리 골짜기길을 따라 500m쯤 가면 자
연과 조화를 이룬 만휴정이 있는데 그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가 장관이다. 정
자에는 만후정 현판외에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이란 선생의 유훈 및 류도
원, 김굉, 김도행, 정박 , 이돈우, 김양근공 등 명망이 있는 분들의 시판과 김
양근공의 중수기가 게판되어 있다.

▣봉정사극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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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72년에 의상조사 (625~702)에 의하여 창건된 안동에서 가장 큰 사찰
로, 물은 본절10동 동서 2개의 암자에 9동이 있어 모두 19동이다. 극락전은
국보15호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이고, 대웅전은 보물55호로
조선초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화엄강당은 보물448호, 고금당은 보물 449호
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많은 문화재들은 각 건조물들이 상호간에 여
주는 균형미가 아주 빼어나다.

고려의 건물로 주심포집인 극락전과 조선조의 건물인 다포계통의 대웅전이
나란히 있어 고건물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극락전은 기둥의 배흘림, 공포의 단조로운 짜임새, 내부가구의 고격함이 건
물의 특징이며, 재하나하나가 모두 국보적 기법을 갖추고 있어 한층 더 높이
평가 되고 있다.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99년에 다녀간 절이기도 하다.

▣태사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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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묘는 안동시의 중심부인 북문동에 자리잡고 있으며, 고려 개국공신 김선
평, 권행, 장길 삼태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1481년 (성종12)에 관찰사 김자행이 목면과 베를 주고 예우하면서부터 묘우
를 세우는 터전을 마련했고 이어서 1540년 (중종35) 안동부사 김광철이 현
위치에 묘를 건립하였으며, 경상도 관찰사 권철이 제전을 설치하고 노복을
주었다.

보물각에는 삼태사의 유물인 옥관자 외 21점이 보존되어 있다. 숭보당 안
에는 퇴계 선생이 지은 중건기문 등이 게판되어 있다. 묘정에는 삼공신비가
세워져 있다.

▣병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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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약 30분 하회방면으로 가다 하회입구에서 병산서원으로 들어간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적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절제와 간결,단순과 체
계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유교건축의 백미이다.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산현
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고려말부터 사림의 학문의 전당이었다. 1613년(광해
군 5년) 우복 정경세 선생 등 유림의 공의로 서애 류성룡 선생의 학덕을 기
리기 위해 존덕사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했다.

1629년 선생의 셋째아들인 수암 류진공을 배향했으며, 1863년(철종14년) \\'
병산\\'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68년(고종 5년) 대원군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제외된 전국47개 서원 중의 한 곳이다. 3월과 9
월 초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산과 강이 어우러져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이곳
에는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신세동 7층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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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로 지정된 벽돌로 정교하게 쌓은 문화재이다.
석탑이 풍미하던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으로 안동의 독특한 전통과 문
화의 창조성을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이 탑은 법흥동 군자정 부근
에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 (벽돌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인 8세
기 경에 건립되었다. 기단부와 탑신부 및 상륜부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 상륜
부는 노반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유실되었다. 기단부에는 네모꼴로 팔
부중상(八部衆像) 과 사천왕상(四天王像) 그리고 12지신을 양각한 판석(板
石) 을 세워 축조하였으며 탑신부는 진회색의 무문전을 어긋나게 쌓아올렸
다. 현재의 높이는 17m이고 기단 폭은 7.5m이다.

▣안동댐 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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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댐 민속경관지 안에 있다.
박물관내 전시실에는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사람이 나서 일생을 살다가 죽음
에 이르기까지의 통과의례를 중심으로 관, 혼, 상, 제인 사례에 중점을 두었
으며, 각종 민속놀이도 재현, 전시하여 안동문화의 전통과 얼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민속자료 3,7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와 함께 야외박물관 전시물로는 석빙고, 월영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2
호), 선성현객사(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29호 ), 초가도토마리집 (경상북도
민속자료 6호), 초가토담집(경상북도 민속자료 14호), 이필구ㅁ자와가집, 박
은숙초가겹방집, 이원모ㅁ자와가집, 박분섭 까치구멍집, 이춘백 초가집, 안동
다례원, 물레방아, 연자방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러한 다양한 전시물들은
관광객은 물론, 학생들의 교육장으로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특히 박분섭 까치구멍집과 박운숙 초가겹방집은 헛제사밥이 유명하며, 이춘
백 초가집은 건진 국수가 별미이다. 안동다례원에는 차를 이용한 밥, 떡, 죽,
국수, 가루차, 잎차우림 등이 준비되어 있어 기호에 맞게 맛볼 수 있다

▣하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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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은 전국유수의 풍산유씨 동족마을이며, 그 터전은 낙동강의 넓은 강
류가 마을 전체를 동.남.서 방향으로 감싸도는 명지이다.그 지형은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이라고 한다.

유씨가 집단마을을 형성하기전에는 대체로 허씨, 안씨 등이 유력한 씨족으로
살아왔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1635년(인조13)의 <동원록>에도 삼성(蔘
姓)이 들어 있기는 하나 이미 유씨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
고 있어, 그 이전에 유씨등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유
씨의 인향조는 8세 전서 종혜씨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과 같은 유씨의 동
족기반은 종흉조 유운룡, 유성룡 형제시대에 이룩된 것이다.

유운룡은 시조에서 14대의 종손이며 유성룡은 시손인데 모두 문중의 거봉이
어서 이 두 계손들을 겸암파, 서애파로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에서 유서 깊
고 규모가 갖추어진 가옥으로서 보물 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들은
모두 풍산읍씨의 소유인데, 특히 그 중에서도 유운룡과 유성룡의 유적이 중
추를 이루고 있어 유씨 동족마을의 형성시기와 역사적 배경을 짐작할 수 있
다.

이 마을을 감싸도는 화천(花川)은 낙동강 상류이며 그 둘레에는 퇴적된 넓은
모래밭이 펼쳐지고, 그 서북족에는 울창한 노송림이 들어서 있어 경관이 아
름답다. 강류의 마을 쪽이 백사장인 데 반하여 건너편은 급준한 층암장벽의
연속이어서 어려 정대가 자리잡고 있어 승경으로서의 연모도 잘 갖추고 있
다. 강류의 북쪽 대안에는 이곳 자연의 으뜸인 부용대의 점벽과 목연정, 화
천서당이 있으며, 서북쪽에서 강물이 돌아나가는 즈음에는 겸안정과 상봉정
이 자리잡고 있어 일련의 하회명구를 이루고 있다. 이곳 강의 최대폭은 대략
300m이며 최대수심은 5m에 이른다.

강 건너 인근과의 교통수단은 나룻배이다. 과거에는 음력 7월 보름에 부용대
밑에서 시회가 있었으며 시회와 아울러 유명한 줄불놀이가 벌어졌었다. 이
강상류화(江上流花)의 놀이는 하회별신굿과 함께 이 고장의 오랜 민간전승놀
이이다. 별신굿에 쓰인 가면들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제작연대는 고
려시대로 추정되어 하회마을의 역사적 배경이 뿌리깊음을 말해 주고 있다.

풍산으로부터의 진입도로와 연결된 큰 강이 이 마을의 중심부를 동서로 관
통하는데, 이 마을 길의 북쪽을 북촌이라 부르고 그 남쪽을 남촌이라 부른
다.
1988년 현재 남북촌의 총 가구수는 188가구이다. 이들 가옥 중 보물로 지정
된 가옥은 보물 제306호인 안동양진당과 보물 제414호인 충효당이 있다.
또한 중요민속자료로는 하회북촌댁(제84호), 하회원지정사(제85호), 하회빈연
정사(제86호), 하회유시주가옥(제87호), 하회옥연정사(제88호), 하회겸암정사
(제89호), 하회남촌댁(제90호), 하회주일제(제91호) 등이 지정되어 있다.
이들 지정 가옥들은 모두가 유씨집안의 소유이다

▣오천 광산김씨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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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도산서원 방면으로 약 20분거리에 목조건물이 우치해 있는 것을
차창으로 볼 수 있다. 점심이나 휴식을 겸하여 들른다면 좋은 위치이다. 안
동댐 수몰시 광산김씨 예안파 소유의 문화재를 이곳으로 집단 이건하였다.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의 소장 고문서,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소장 전적, 탁청
정, 후조당, 탁청정종가,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유물전시관등이 있다

▣임청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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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칸의 집이었으나 일제의 철도건설로 반이상이 잘려 나간 상태이다. 독립
운동으로 인하여 집안이 풍지박산이 나고 현재는 잘려나간 자리에 아직도
일본이 놓은 중앙선 철도소리만 요란하다.

세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용헌 이원의 여섯째 아들 영산현감 이증이 안동
산수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 증의 셋째아들 형조좌랑 이
명이 중종 때 건립한 정자는 평면구성이 \\'J\\'자형으로 된 조선 중기의 별당형
정자건축이다.
목조건물로는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임진왜란을 겪어 온 오랜 건물이다. 임
청각이란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귀절 중 \\'동쪽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에서 따온 것이다. 바로 임청각
앞을 흐르는 맑은 물과 영남산 양지바른 곳에 터전을 잡은 건물이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농암 이현보, 백사 윤훤 등 제현들의 시판이 게판되어 있다.

▣예안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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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204-1
조선 시대에는 1군에 1향교를 두었는데, 예안향교는 예안현에 소속되었던 향
교이다. 조선 초기에 건립되었으며, 선조 34년(1601년)에 중소가 있었고, 영
조 21년(1745년)에 크게 고쳐 지었다. 향교 내에는 대성전, 명륜당, 전사청,
동.서재가 있다.

▣이천동 석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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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북쪽 이천동 태화산 산록 \\'제비원\\'에 있는 고려시대 마애불 입상이
다. 일반적으로 \\'제비원 미륵\\'으로 친숙하다. 연미사(燕尾寺) 옛 터에 있는
석불상인데 지금은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연미사로 명맥을 이어 오고 있
다.

거대한 자연석 화강암 석벽에 12.38m에 달하는 신상(身像)을 새기고 다
시 그 위에 별개의 머리를 얹은 구조로 거구이면서 토속적인 고려불상의 양
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이미 안동소주의 등록 상표(1920)
로 호응을 받은 바 있는 등 외부에 안동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이다. 제비원
은 \\'성주의 본향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고 시작되는
성주풀이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명(明)나라 장수 이여송이 칼을 빼어 불상의
목을 쳤다는 등 많은 전설도 지니고 있다. 석불상 바로 뒷편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된 3층석탑이 있다.

▣육사 생가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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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 육사 이원록(1904-1944) 선생의 시비이다. 독립운동가이며 시인인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며, 한편으로는 주옥같은 시를 쓰다
가 일본 경찰에 잡혀 중국 북경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육사 선생의 생가는
안동댐으로 인해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갔고, 옛집이 있던 자리는 물에 잠
겼다.

1993년 당시 안동군에서 물에 잠긴 생가터를 흙으로 돋우어 높이고, 선생을
추모하는 시비를 세웠다. 비는 포도 모양으로 다듬은 일곱 개의 화강암위에
동판(구리판)으로 만든 육사 선생의 얼굴 모습과 대표작 \\'청포도\\'가 새겨진
비를 얹어놓았다.

보물각에는 삼태사의 유물인 옥관자 외 21점이 보존되어 있다. 숭보당 안에
는 퇴계 선생이 지은 중건기문 등이 게판되어 있다. 묘정에는 삼공신비가 세
워져 있다.

▣지례 예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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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독서의 시간과 창작활동에 좋은 고건축이 있다.
임하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있던 고건물들을 이곳에 이건 복원하여 조성하
였다. 예술인들의 창작활동 및 회의장소, 전통생활학습장, 유교연수원 등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문화재 3점 (지촌종택, 지촌제청, 지산서당)이 있다. 특히
지산서당은 지례예술창작촌의 중심건물로 쓰이고 있으며 각종 학술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는 건물이다.

임동면 소재지 500 m 를 못미쳐서 오른쪽에 있는 수곡교를 건너 포장도로
를 따라 박곡리를 지나 고개마루를 올라간다. 고개마루에서 왼쪽으로 가면
지례예술창작촌이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용계은행나무가 있다.

▣조탑동 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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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석과 벽돌을 혼용한 전탑으로 조성이후 여러차례의 손질 때 그렇게 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높이 8.65m 기단 너비 7m로 5층 전탑은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안동에서 약 35리 지점에 일직면 소재지가 있고 이곳에서 5리 쯤 가면 5층
전탑이 있다. 이곳에서 골짜기로 40리쯤 더 들어가면 5층으로 추정 되는 무
너진 전탑 1기가 있었으며, 또한 국보 제16호인 신세동 7층전탑과 보물 제
56호인 동부동 5층전탑 등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안돋지역에는 다수의
전탑이 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부근에는 석탑재료, 석등재료 등이 남아있고 석불이 있었다고 하니 큰 절
터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감실 옆의 양각된 인왕상은 조형미가 일품이어서
사진작가들의 촬영대상이 된다

▣추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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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사는 원래 상촌 김자수(1351-1413) 선생의 어머니 일직 손씨의 묘소
아래에 있던 건물인데, 안동댐으로 수몰되어 197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
았다. 상촌 선생은 안동시 금곡동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말 충신, 효자로 이름
높다. 그는 공민왕 23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충청도 관찰서, 대사성 등을
지냈으며, 고려가 망하자 절개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조선 태종이 강제로 벼슬을 내리고 부르자, 서울로 가던 중 포은 정
몽주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광주에 이르자 자결했다.

추원재 앞에는 고려 공양왕이 내린 상촌 김자수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경
상북도 유형문화재 38호)가 있다. 비의 앞면에는 \\'효자 고려 도관찰사 김자
수지리(孝子高麗都觀察使金自粹之里)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그의 행적과
어머니에 대한 효행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효자비도 안동댐 건설로 인하
여 추원재와 같이 이곳으로 옮겼다.

▣영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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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루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 3대루의 하나로, 안동의
대표적인 누각이다. 고려 시대에 건축되었으며, 원래 현재의 위치에서 낙동
강 건너편 물가에 있었다. 홍건적의 난 때 안동까지 피난 왔던 고려 공민왕
이 난이 평정되자 개경으로 돌아가서 \\'영호루\\'라고 쓴 현판 글자를 내려 주
었다. 이 현판을 걸기 위하여 1567년 안동 판관 신자전이 누각의 규모를 더
욱 확장하여 지었는데, 누가 강물에 너무 가까이 있어 홍수로 인해 떠내려가
고 다시 짓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다가, 1934년 갑술년 홍수 때는 건물이 완
전히 떠내려 갔다.

현 영호루는 1970년 철근 콘크리트로 건축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한옥 누
각이다. 북쪽 면에는 공민왕 친필 한자 현판 \\'영호루(映湖樓)로 걸고, 남쪽
면에는 박정희 대통령 친필 한글 현판 \\'영호루\\'를 걸었다.

▣애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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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농암 이현보(1467-1555) 선생이 46세 때 지었다고 한다. 94세의
부친이 늙어감을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애일당(愛日堂)이
라고 하였다고 하니, 당호(집에 붙인 이름)에도 선생의 지극한 선생의 효성
이 나타나 있다. 농암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벼슬은 안동 부사를 거쳐
지중추 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시문(시와 문장)에 뛰어나 그가 지은 시조 \\'어부사\\'가 청구영언에 전한
다.
또, 애일당 축대 아래쪽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3호로 지정된 \\'농암 선생
정대 구장( 암선생정대특구장)\\'이란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바위의 면을 평평하게 깎은 후 글자를 음각(들어가게 새김)한 이 글자는 한
자의 크기가 가로 100cm, 세로 70cm나 된다.

▣퇴계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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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50세 때, 이 곳 토계의 시냇가에 \\'한서암\\'을
짓고 살기 시작하여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게 되었다. 원래의 건물은 화재로
없어지고 현 종택은 1929년 옛 종택의 규모를 참고하여 다시 지은 것으로,
정문에 \\'퇴계 선생 구택(退溪先生舊宅)\\'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퇴계 선생의
묘소는 종택에서 남쪽으로 약 1km 떨어진 건지산 중턱에 있다.

▣퇴계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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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도산면 사무소앞에서 퇴계종택을 거쳐 약 1km지점 산에 위치하고 있
다. 선생은 생전에 자신의 비에 적힐 비문을 썼으며 후손들이 자기를 과대칭
송하는 것을 방지했다.

선생의 유품 : 서기(書 ), 매화연(梅花硯), 청려장(靑藜杖), 등경(燈), 연갑
(硯匣), 흑단연(黑端硯), 옥서진(玉書鎭), 안석(安席), 투호(投壺), 투호(投壺),
혼천의(渾天儀), 완석(莞席).

▣소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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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건축 연대를 확실히 알지 못하나, 조건 중기의 학자 서해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조에 지은 별당이다(청풍 군수 이고가 건립하여 무남
독녀 사위인 서해에게 무려주었다는 설도 있음). 그 후 서해는 이 집을 아들
인 약봉 서성(1558-1631)에게 물려주었는데 이 집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정(丁)자형의 기와집으로 되어 있다.
소호헌 동편에 있는 본체는 암행어사, 5도 관찰사 및 형조, 병조 판서를 역
임한 약봉이 태어난 건물이다.

▣체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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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자는 만포 이만적(1663-1744) 선생이 효종 때에 지어 학문을 닦던 곳
이다. 그 후 순조 때 효자로 정려(국가에서 충신, 효자, 열녀가 살던 마을에
정문을 세워 기리던 일)를 받은 용눌재 이한오 선생이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
고 효성을 다하던 곳이기도 하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정자 앞
연못에는 삼신산을 본떠 만든 세 개의 인공섬이 있고, \\'담락제(湛樂 )\\'란 현
판 글씨는 조선조 제일의 화가로 칭송받는 단원 김홍도가 썼다.

▣학봉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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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선조대 명신이며 학자인 학봉 김성일 선생의 묘소이다. 선생은 일찍이
퇴계 문화에서 성리학적 수양을 쌓고 인격을 도야하였으며 그 윤리와 가치
를 직접 실천해 나가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좌청룡 우백호의 길지에 위치하
고 있다. 묘소옆에 봉황알처럼 생긴 둥근 바위가 있는데 이것은 매장장소에
서 출토된 것이다.

▣안동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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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에 완공된 안동댐은 높이 83미터, 길이 612미터에 총저수량 12억
4,800만 톤으로 홍수 조절과 전력공급 이라는 댐의 기본 목적은 물론이고
농,공업용 그리고 생활용수까지 공급하는 다목적 댐이다.

댐의 정상에는 우리 나라에서 세번째로 큰 인공 호수인 안동호의 수려한 경
관이 펼쳐져 있고 선착장이 위치해 있어 유람선 이용이 가능하며 댐 주변은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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