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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원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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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류충현약용버섯 작성일05-12-12 09:17 조회2,2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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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원 석불(보물 제115호)]
- 일명 연미사의 불상-
** [출처/"안동에 왔니껴"(류희걸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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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수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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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영주 통로 국도 5호선을 따라 약 3km를 가면 한티재에 이른다. 여기는 제비원 주유소와 휴게소(休憩所)가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곳이다.
한티재를 넘어 다시 2km를 더가면 도로 우측에 거대한 마애불(磨崖佛)이 웃음을 머금은 채 서 있다. 이 불상이 바로 그 유명한 제비원 석불이다. 속칭 제비원미륵불이라고 불리우는 이 불상의 뒤편에는 자그마한 절이 있는데 이를 연미사(燕尾寺) 또는 연비사(燕飛寺)라고도 한다.

또 이곳은 고려시대(高麗時代) 때 역원(驛院) 제도에 의한 관리(官吏)와 행인들의 숙소(宿所)를 겸한 여관격인 원(院)이 있었으니 곧 제비원이란 것이다.

제비원은 성주풀이에서 ‘성주의 본향이 어디메뇨? 경상도라 안동땅에 제비원이 본일레라’고 하는 사설에 나오듯이 우리 민족의 민속신앙(民俗信仰)의 정신적(精神的)인 지주(支柱)로 자리매김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더욱이 제비원은 안동팔경의 하나로 연비원명전만추(燕飛院名傳萬秋)라 한다.

[영가지(永嘉誌)]에 연비원(燕飛院) 불사(佛舍)는 부 서쪽 12리 오도산(五圖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큰돌을 세워 불상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10여 장이다. 당나라 정관 8년[634]에 전각을 만들었으며 6칸의 누각으로 덮혀 있었다.

집모양은 하늘에 날개를 편듯 하다. 뒤에 두차례에 걸쳐 중창(重創)하였으나 기둥과 대들보 등의 제목은 모두 옛 것 그대로를 썼다.

燕飛院佛寺 在府西北二十五里 五圖山南 因立石作
佛像 高十餘丈 唐貞觀八年作六間閣以覆之飛甍縹緲
翼然若半空厥 後再次重創 棟梁之材皆因舊焉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보덕법사의 11제자(弟子)중의 한사람인 명덕(明德)대사(大師)가 634년에 불상을 돌에 새기고 전각을 세워 연구사(燕口寺)를 창건(創建)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상을 덮은 전각이 제비의 모양과 흡사(恰似)하여 연자루(燕子樓)라 하였고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가 제비 꼬리쪽에 있어서 연미사(燕尾寺)라 불렀으며 제비부리에 해당하는 곳에 법당(法堂)이 있으므로 연구사(燕口寺)라 한다.

연구사가 있는 산을 오도산(五圖山)이라 부른다. 오도는 불상, 연자루, 삼층석탑, 연미사, 소나무 이 다섯가지가 조화(調和)있게 어울려 그림같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중기에 와서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절은 폐사되기에 이르고 다만 석불(石佛) 하나만 남게 되었다. 그후 일제(日帝)시대(時代) 때에 와서 봉정사 신도모임인 거사림(居士林)이란 등촉계원들이 발의(發議)하여 옛터에 3칸의 법당을 짓고 이름하여 연미사란 현판을 걸었으니 곧 갑술년(1934)이다.


◈ 전설(傳說)



연미사와 제비원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연이처녀와 노랭이 김씨총각

신라시대. 고창이라고 불리우던 이곳에는 여관[원이라고함]이 하나 있었다. 이 여관에 어릴 때 조실부모하고 갈 곳 없는 연이란 처녀가 있었다. 그는 예쁘고 마음씨가 몹씨 착하여 남에게 늘 칭송을 받았다. 그는 항상(恒常) 길손들에게 후대와 적선을 다했다.

방에 불을 따뜻하게 넣어주고 밥도 많이 담아 주었으며 빨래까지 해 주는 가운데 밤늦게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곧바로 잠을 자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글을 읽고 공부하며 또 내일은 손님들에게 어떠한 친절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궁리를 하였다.

그러는 한편 불심도 대단하여 새벽에 일어나 불공을 드리고 불상주변을 깨끗이 청소를 했다. 그리고 부처에 치성(致誠)을 드리려온 사람들에게까지 친절(親切)을 베풀어 연(燕)이의 고마운 마음씨를 모두가 칭찬하였다.

건너 마을에 사는 부자집 아들 노랭이 김씨총각은 연이 처녀를 사모(思慕)하다가 상사병(相思病)에 걸려 그만 들어눕게 되었다. 그러자 몇일만에 죽어서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서게 되었는데 염라대왕은 그를 한참 노려 보더니 “아직 너는 사바세계의 인연을 다하지 않았으니 공덕(功德)을 베푼다면 다시 이성으로 살아 나갈 수가 있느니라!”고 말 하였다.

김씨 총각이 “대왕님! 저는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염라대왕은 다시 입을 열었다.

“듣거라! 네 집 광속에 쌓아둔 재물 따위는 여기 이 명부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사바세계 사람이 여기 들어오면 그들을 위한 광이 하나씩 마련 되어있는데 저것이 네 몫의 광이다. 그 옆에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광이니라. 둘러 보도록 하여라.”

노랭이 총각이 자기몫의 광을 드려다보니 거기에는 냉기만 감돌고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으며 다만 한쪽 구석에 볏집 서너단이 놓여있을 뿐이였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연이의 광에는 금빛 찬란한 온갖 보석과 곡식들이 가득차 있지를 않는가!

이를 본 김씨 총각은 인색(吝嗇)했던 자기의 과거를 크게 뉘우치고 현실을 후회(後悔)하게 되었다. 염라대왕앞에 엎드려 “제 몫의 광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라고 말했다.

이때 염라대왕은 엄숙(嚴肅)한 어조로 “반짝하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인간세상(人間世上)이니라! 초로(草露)와 같은 인생을 살면서 탐욕(貪慾)의 노예(奴隸)가 되어 재물(財物)만을 알고 사람의 도리(道理)를 외면했으니 너는 천벌(天罰)을 받아 마땅하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순리(順理)대로 너는 그 죄값에 장차 소가되어 억만겁 긴 세월(歲月)동안 힘겨운 일에 시달려야 한다.

그러니 저 광속에 든 볏짚은 너의 목에 걸 멍에줄을 만들 짚이니라. 그렇지만 너가 괄시했던 연이가 장차 여기를 오면 온갖 보물(寶物)과 재물(財物)을 가지고 복을 누리도록 마련되어 있다. 이는 그 처녀의 착한 행실에 대한 보답(報答)의 재물이다. 이것을 너가 빌려 쓰고 인간세상(人間世上)에 돌아가 너의 집 재산으로 연이에게 갑도록 하여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왕과 약속하자 노랭이 김씨 총각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다음날 연이를 찾아가서 죽었다가 살아나온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말하고 자기의 재물 모두를 연이에게 주었다.

뜻하지도 않았던 많은 재물을 얻은 연이는 그것을 부처님을 위한 일에 쓰기로 결심하였다. 평소 언덕위에서 비바람에 시달리고 서있는 부처님을 안타깝게 보아온 터인지라. 당시 유명한 도선국사(道詵國師)를 찾아가 석불 주변에 큰 절을 세우도록 재물을 몽땅 바쳤다.

이 공사는 막대(莫大)하여 5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그리하여 불상을 덮는 전각(殿閣)이 드디어 완공(完工)되어 공중에 날개를 펼친 듯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역사(役事)를 마치는 마지막 날에 밥을 이고 높은 바위를 오르던 연이가 실족(失足)하여 벼랑끝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연이는 홀연이 한 마리의 제비가되어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이러한 전설로 ‘제비가 날아 갔다’는 뜻에서 이곳의 지명이 연비사(燕飛寺) 또는 연미사(燕尾寺)라고 이름하며 그 여관은 연원(燕院). 즉 제비원이라 오늘날 불려지고 있다.

2] 대부송(大夫松)의 전설

성주의 본향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이로다. 제비원 솔씨받아 조평 어평 던졌더니 소부동(小夫棟)이 되었구나. 소부동이 점점자라 대부동(大夫棟)이 되었구나. 어라만수…….

성주 풀이는 이런 사설로 시작되는데 여기 나오는 대부동(大夫棟)에 관한 어원(語源)과 전설(傳說)은 이러하다.
대부(大夫)란 말은 벼슬한 양반을 말한다. 그렇다면 대부와 성주는 무슨 관계가 있을가? 여기에는 이러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簒奪)한 세조(世祖)가 말년에는 자기가 저지른 죄악의 천벌이 두려워 속죄하기 위해 이름있는 절이라면 모조리 찾아 다니면서 시주를 하고 불공을 드리며 참회(慙悔)를 하였다. 그런데 세조가 임금이된지 얼마않되어 온몸에 악성(惡性)종창(腫脹)이 번져 좋다는 약은 모조리 썼지만 도무지 낫지를 않았다.

그래서 왕은 약수터와 온천을 찾아 다니며치료를 하게 되었는데 하루는 오대산 월정사를 다녀 경주로 행차길에 안동의 제비원 앞을 지나 가게 되었다.

그때 왕이 탄 어가의 꼭대기에 소나무 가지가 걸려 지나갈 수가 없었다. 세조는 수레를 내려 소나무를 보고 ‘네 뜻을 알겠구나! 일개 식물에 불과한 너조차 죄지은 나를 저주하고 있으니 내 진정 잘못을 속죄(贖罪)하리다’ 하며 소나무에게 빌었다.

그리고 ‘소나무야! 너의 뜻이 갸륵하구나 내 너를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명하노라’ 하고서 붉은 띠를 둘러 주면서 대부송(大夫松)이란 호를 내렸다. 그리하자 소나무 가지가 서서히 제자리로 올라 갔다는 것이다.

왕은 착잡한 마음으로 대부송을 돌아보며 병든 몸을 이끌고 길을 떠났다. 이런 까닭에 제비원에 서있는 소나무의 이름이 대부송으로 불리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주풀이에 대부동(大夫棟)은 대부송으로 만든 기둥이란 뜻이라고 한다.

3] 이여송은 불상의 목을 베

제비원의 미륵은 몸과 머리가 다른 시대의 불상이다. 몸은 신라의 것이고 머리는 고려의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도 불상의 목을 벤 자가 이여송이란 전설이 있으니 믿기는 어려우나 어디 전설이니까 한번 들어 보자. 임진왜란 당시 구원병으로 우리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은 전란(戰亂)이 평정(平征)되자 우리 나라 방방곡곡을 돌아 다니며 인물이 날 명당터를 모조리 그 맥을 끊어 버리려고 지혈(地穴)과 지맥(地脈)에 쇠말뚝을 밖았다고 한다.

이무렵 말을 타고 제비원을 지나던 이여송의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이여송이 사방을 둘러보니 언덕위에 서 있는 큰 미륵을 발견하게 되었다. 필경 저미륵의 조화라고 생각한 그는 칼을 빼어 단칼에 목을 베어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랬더니 말의 발굽이 떨어져 길을 지나 갔다는 이야기다. 그때 베어진 목에서 흘렀던 피 때문에 지금도 앞 가슴에는 붉은 핏자국이 있고 왼쪽 어깨에는 말발굽 자국이 있다.
그때 떨어진 머리는 오래도록 땅 바닥에 뒹굴다가 어떤 스님 한분이 목을 다시 붙이고 시멘트로 발라 염줄을 건 것처럼 만들어 오늘날 전하고 있다.

4] 불상을 만든 형제의 전설

제비원 불상을 만든 이야기로 이런 전설이 있다. 그 옛날 어느 형제가 살았는데 그들은 뛰어난 석공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까닭에 형제의 조각 솜씨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막상막하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니 일세(一世)에 제일가는 조각가는 둘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형제는 의논(議論) 끝에 불상을 먼저 만든 자는 살아남고 늦게 만든자는 죽기로 약속하고 시합에 들어갔다.

이에 동생은 훌융한 불상을 먼저 만들고자 열심히 돌을 갈고 다듬었으나 형은 어쩐지 빈둥빈둥 놀기만 하였다. 어느때가 되었을가. 약속한 날짜가 되었다.
그날까지 동생은 불상을 완성하지 못했으나 형은 미륵의 머리만 조각하여 큰바위에 얹고 신상을 새겨 멋진 불상을 만들었다.

동생은 부처의 몸체부터 만드느라 기간내에 완성하지 못하여 그만 죽고 말았다.
그때 동생이 만들다 미완성한 불상은 개천 가에 굴렀다고 하는데 좀처럼 발견할 수가 없다.

제비원석불은 그때 형이 만든 것이라고 전하며 현재의 부처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이 까닭이라고 전한다.

5] 제비원과 법룡사 절짓기 시합

안동시내에 법룡사라는 절이 아직도 도심 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사찰은 6. 25동란 때 불타버린 것을 근래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옛날에 뛰어난 목수 두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경쟁 의식(意識)이 강하여 서로 자기가 제일가는 대목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던 끝에 절짓기 내기를 했으니 그절이 바로 황룡사와 제비원의 절이다.

“내가 먼저 황룡사를 짓고 뒷편에 천년도읍지(千年都邑地)란 현판을 달면 아마 그 서기(瑞氣)가 제비원까지 뻗칠 것일세. 그렇게 알게나.”

“무었이라 ! 나는 제비원을 먼저 짓고 한티재를 넘어 올 터이니 두고보세.” 서로는 장담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열심히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제비원을 짓는 사람이 절을 다 짓고 한티재를 올라와서 내려다보니 법룡사 뒤편에 천년도읍지(千年都邑地)란 현판 글씨가 광채(光彩)를 내고 있었다. 그 서기는 한티재에까지 비친 것이다.

법룡사를 지은 대목이 내기에서 이긴 까닭에 큰소리로 호령하며 의기양양하였다.
“야! 이놈아 . 그것 보라지! 자네가 나를 딸아 오려면 아직은 멀었네.”

경쟁에서 진 제비원 목수는 “내가 자네에게 지긴 졌내만. 내가 지은 절은 내가 죽어도 이 세상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일세. 그러니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한은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는 자신이 지은 절의 지붕에 올라가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말았다. 지붕에서 떨어진 목수는 그만 제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이 절의 이름을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는 뜻으로 연비사(燕飛寺)라고 하였다. 그때의 법룡사는 없어졌지만 제비원이란 이름은 오늘까지 영원하게 남아 있게 된 것이다.

6] 함부로 다루면 천벌 내려

제비원 불상을 함부로 다루면 천벌을 받는다고 한다. 일제 말기때의 일이다. 어느 신도가 낡은 불상의 목을 석회로 땜을 하고 목부분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 염주를 두른 듯이 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장난기가 발동되어 무엄하게도 부처의 입술에 붉은 색을 칠하여 본래 거룩한 모습을 다치게 하였다.

그 결과 얼마되지 않아 그 사람은 피할 수 없는 사건에 휘말려 순사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고 오랜 기간동안 옥(獄)살이를 했다고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일제때 어떤 청년이 제비원으로 소풍을 갔는데 함께 간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한때를 즐겼다. 그러던 중 조씨성을 가진 한 청년이 미륵의 어깨에 올라가서 얼굴과 몸에 소변을 보았다.

모든 친구들은 그의 못된 행동에 우려를 금치 못했다. 소변을 본 그 청년은 그날 밤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서 몹시 앓게 되었다. 다음 날에는 낭신이 부어올라 기어코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해 그는 부처의 축[저주]을 맞아 죽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7] 자리 빼앗긴 울바위

이천동을 넘어가면 울바위 골이란 지명이 있다. 제비원 미륵 불상이 조성되기전에 큰 바위 두 개가 있었는데 서로가 그 자리에 가서 좌정하려고 했으나 제비원의 미륵불이 먼저 차지 하는 바람에 바위 하나는 가지 못하고 지금의 울바위골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미륵불 바위는 자리를 먼저 잡았기 때문에 불도들이 받들어 모시는 미륵이 되었지만 이 바위는 그렇지 못하여 영원히 바위로만 남게 되었다.

이를 원통하게 생각하여 그 바위는 울면서 나날을 보낼 뿐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일러 ‘울 바위’라고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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