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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옥진각 매화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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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8-09-22 09:33 조회1,8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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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옥진각 매화등]
-<글 /추포 : 류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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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ghkemd.jpg

陶山書院은 퇴계 이황 [李滉]선생을 추모하는 사액 [賜額] 서원이란 곳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에 현지를 가보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천원짜리 지폐를 뒤집어 보기 바란다. 거기에는 도산서원이 글려저 있다.

이처럼 유명한 서원과 퇴계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여기서 새삼 스럽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우리 국민 모두가 잘알고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날 도산서원을 찾은 청년 세사람이 말했다는 다음 이야기는 한심

스럽기만 하다.

사연인즉 그들은 제각기 도산서원을 설명했는데 먼저 한청년이 < 도산선생

서원 좋다 >라고 말하자 <도산선생은 안창호가 아니냐 ? >하면서 다른 청년

은 틀렸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나서 자기는 설명을 이렇게 했다. <도산서원

은 퇴계 이황을 모시는 서원이다. 퇴계는 세계적인 섹스학 박사란 말이야 >

제법 학술적인 이야기를 유창하게 늘어 놓는다. <퇴계선생이 섹쓰학 박사란

증거는 " 성학십도"를 만들었기 때문이지 > 하면서 거침없는 설명을 한다.

그러자 마지막 세번째 청년은 < 야 ! 이사람들아 자네들 모두가 다틀렸어 !

여기는 사찰이다. 전교당은 대웅전이고 상덕사는 신령각이다 >건물에 화려한

단청을 보면 알수있다는 것이다.

웃어야할가 ? 울어야할가 ? 이런 발상은 농담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석연치

않다. 그러나 청년들의 말에는 각기 의미를 지녔다고 본다. 도산은 안창호

선생의 호이므로 그분의 서원이란 말이였고 섹쓰학은 성학십도를 성에대한

열가지 도식으로 알았을것이며 사찰이라 하였음은 호화스러운 금모로 단청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말은 누가 지어낸 어설픈 유머라고 하겠지만 진정 이런 일이 있었

다면 부끄러운 일일수밖에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같은 망발이 없도록

하자면 사전에 유명인사와 문화유적에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지않으면 안된

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65년도 교육청 근무 시절부터 도산서원을 무수히 드나들었다. 그

때는 건물이 퇴락하고 주위환경은 매우 산만하였다. 또 서원을 찾는사람

들이라곤 고작 유사나 유림 몇 분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경향각지에서

수많은 관람객이 모여들고 국내외를 비롯한 학자들도 적지 않게 찾아오고

있으니 퇴계의 학문사상은 만대의 사표로 그 빛을 날로 더해가고 있다.

더욱이 1969년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지로 서원을 정화하여 건물보수는

물론이고 지붕에는 내림막사를 사용하는 등 전교당과 상덕사에는 금모로

단청을하였고 담장은 사고석으로 모두바꾸었다.그리고 서원 일대를 사적

제 170 호로 지정 보호되면서 사무관을 관리책임자로한 사업소를 설치하여

원할한 관리에 임하고있다.

정화 보수당시에 나는 안동군 공보실 문화재 사무담당자로 많은 고충도

있었으나 박대통령께서 書院을 巡視했을때 자리에 함께한 영광도 있었다.

그때는 평직원이 었지만 그후 문화재 계장이 되면서 계속하여 15 년간을

도산서원의 보호에 부심했으니 어려움도 있었고 보람도 많았다.

맨처음 관리소를 설치하고 관리권 인수관계로 김명호 군수님과함께 고직

이로부터 열쇄 꾸러미를 받아내던일 그리고 서원광장에 마사토 포장잘못

으로 소금물이 흘러 고사된 열정옆의 향나무 와 광장느티나무를 새로심던

일이 무척 어려웠다. 보람이 있었다면 제 1 회 퇴계학 국제 학술상시상식

준비를 원활히하여 국제적인 학자를 모시고 전국 유림들과 함께 성황리에

행사를 마치게 된점과 퇴계 유물을 연구하고 서원의 각종 유래를 소상하게

알수있었다는 것이 큰 보람이라 하겠다.

그동안 서원을 드나들면서 연구하고 배운결과 밝혀진 두가지 내용을 기술

하여 독자들로하여금 올바른 이해를 제고 시키고자 한다.

도산서원 옥진각에는 퇴계선생의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증에 소위

<매화등>이란 자기로된 유물 하나가 있다. 퇴계는 평소 매화를 사랑하여

명상을 할때는 반드시 이자기로 촛불위를 덮어 투각된 매화무늬가 방안에

가득차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문에 사람들은 그 자기를 매화등

< 매화등[梅花燈] >이라 이름하여 오늘날까지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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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매화등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반증 할 수 있는 근거를 든다면

매화는 그화엽이 5 개인데 여기있는 매화등이란 자기에는 6 엽이니 이꽃은

매화가아니다. 또 촛불로 인하여 매화무늬가 방안에 비친다고 한말도 맡지

를 않는다. 자기를 자세히 들어다보면 소위 매화 무늬란 그림에는 투각이

아니고 그냥 그림으로만 처리 되어있다. 이때문에 매화와 등불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결론적으로 매화등은 틀린 표현이며 이름을

다시 붙친다면 자기온등[瓷器溫登] 이 옳을 것이다.

등자는 오를등 글씨아래에 두점이 찍힌 걸상登자이다. 이렇게볼때 퇴계

선생이 명상할때 그위에 걸터 앉았던 의자로 생각된다. 더욱 뒷바침 할수

있음은 퇴계는 평소에 이질로 고생했다는 기록을보아 그 자기및에 촛불을

켜서 따뜻해지면 자주 올라앉아 치료의 효과를 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직도 옥진각을 찾는 관람객들이 매화등으로 오해하고 있다면 이기회에

걸상등자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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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가지 도산서원의 < 광명실 > 이란 현판을 퇴계가 썼다는 사실이다.

원래 서원을 조영함은 유명인사가 서거한뒤 그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서

유생이나 사림이 세우게되는 법인데 어찌하여 자신의 서원에 현판 글씨

를 쓸수가 있단 말인가 ? 고 반문이 있을 터이다. 바로 이것이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물음이다. 물론 자기서원에 자기가 현판을 쓸수 없음은 당연

지사이다. 그렇다면 광명실 현판을 퇴계가 썼다 고한 나의 말은 틀렸다고

해야만 옳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퇴계 선생은 일찍이 역동 우탁 선생을 추모하는

역동서원을 주창하여 이서원의 현판 글씨를 모두 자필하였다. 그런데 그

역동서원이 회철 될때 현판 글씨를 도산서원에 보관한 적이 있다. 그 때에

도산서원 측에서 장서각 현판이 없자 역동서원 장서각 현판글씨인 광명실

을 탁본으로 두개를 만들어 동서 장서각에 게첨 했던 까닭이다.

이런 내용을 독자여분은 이해하고 다음에 도산서원을 찾는 기회가 있거든

한번 쭘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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